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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댈 곳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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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Jul 21. 2023

멋짐: 어른의 멋짐

다정하고 정성스러운 반복된 행동


멋지다: 보기에 썩 좋다. 형용사 보기에 썩 좋다.


아이 초등학교의 교통봉사 날. 비가 억수 같이 내린다. 다행히 바람은 안 분다. 아이들이 주로 이동하는 학교 주변 횡단보도에 서서 정지라 적힌 노란 깃발을 신호등 색깔에 따라 옆으로 앞으로 움직이면 되는 일이다.



초등학교 본관에서 형광 노란색 조끼와 노란 깃발을 챙겨 나왔다. 배정받은 횡단보도 앞에 홀로 섰다. 확실히 깃발이 있으니 달리려는 아이들이 멈칫한다. 등교 마감시간이 임박해지자 중학생들은 마구 내달릴 준비를 한다. 차량도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이를 유치원 차량에 탑승시킨 한 아버님이 횡단보도는 여전히 빨간불이나, 자동차 신호등은 빨간불로 바뀌려는 순간 냅다 달려오셨다. 뒤에 있던 아이들도 같이 따라오려는 찰나에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내 목숨이 중한가, 정시 출근이 중한가?라고 했을 때, 답은 정해져 있다. 목숨이 중하지. 하지만 현실은 제 목숨이 중요해서 지각을 했습니다로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그럼 일찍 나와야지라는 상대의 말에 오늘 아이가 아파서 등원준비가 블라블라라고 얘기하기 쉽지 않다. 보통 죄송합니다라고 넘어가곤 할 테다.


교복을 정갈하게 입고 가방도 우산도 없이 등교하는 학생, 자다 일어나 머리에 새집을 짓고 가는 학생, 우천 용품 풀장착을 하고 가는 학생, 할머니와 손을 꼭 잡고 가는 학생, 우산 쓰도 스마트폰 하며 걸어는 학생, 섬유유연제 향기가 옷에서 진하게 나는 학생. 우산색깔만큼이나 등굣길 모습은 형형색색이었다.




한 손에는 우산, 한 손에는 깃발을 들고 올렸다 내렸다는 45분 정도 반복하니 팔이 후덜거렸다. 학부모가 되려면 우천 시 깃발을 45분 정도 움직일 수 있는 근지구력도 있어야 하는구나를 떠올리며, 학교로 장비를 반납하러 갔다.


저기 멀리 본관과 후동 사잇길에 교장 선생님이 서서 무언가를 하신다. 다가가보니 3-4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의 파스텔톤 핑크 우산을 고이 접어주고 계셨다. 저렇게 곱게 접어주시다니!


형광조끼를 입고, 깃발을 들고 오는 나를 보며 “비 오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신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반가운 마음이 너무 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은 날 모르지만, 난 교장 선생님을 안다. 학기 첫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등교 시간에 아이들을 맞이하셨다. 감사한 마음, 존경의 마음, 놀라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교장 선생님께 성큼성큼 다가가 활짝 웃으며 인사드렸다. 주책이었을 테다.


“안녕하세요. 1학년 *반 호제 엄마입니다.”

”네?! 아! 안녕하세요!“


”매일 아침 교장 선생님께 꾸벅 인사하는 학생 엄마예요.“

”아~ 그 폴더인사하는 학생! 오늘 아침에도 인사하며, 바닥에 있는 하얀 동글동글한 알을 보며, 이거 뭐냐고 물었어요. 비비탄이 맞냐고. 아주 예의 바른 학생이에요. “


가끔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마주보며 짧게 뭐라뭐라 얘기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랑 할머니가 알려주셨는데, 이런 얘기를 나눴나보다.


”고맙습니다! 호제가 집에 와서 오늘도 교장 선생님이 계셨다고 말하기도 해요. 친정어머니가 등교를 해주시는데  매일 하루 교장 선생님이 나와계신다며 놀라고 대단하고 감사하다고 그러셔요.  제가 등교를 몇 번 못 했는데 그때도 교장 선생님이 정말 계셔서 깜짝 놀랐었어요. 너무 멋지십니다.“


교장 선생님은 살짝 당황하시다가 눈을 말똥말똥 뜨시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말했다.


”아유, 아이들을 맞이하는 건데요. 뭘~.“

”어머, 그걸 매일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해요. 항상 감사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보여주시는 모습에서 많이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는 장비를 반납하러 건물로 들어왔다. 정리하고 나가는 길에 뵌 교장 선생님은 남색 신발주머니를 정리하는 학생을 도와주고 있었다. 늦게 오는 학생까지 모두 본 뒤에야 들어가시나 보다.




교장 선생님은 입학식 행사에서 무대에 있는 모습으로 처음 뵈었다. 아이들도 첫날이지만 본인도 여기 첫 출근날이라고 하셨다.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이 끝나고 한 아이가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들었다. 그 아이에게 선생님이 마이크를 가져갔다. 아이는 씩씩하게 말했다.


”교장 선생님, 왜 이렇게 멋지세요?“


아이의 질문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됐다. 다른 아이도 멋있다고 외쳤다.


그날, 나는 아직 유치원티를 못 벗어낸 아이들의 발랄함에서 나온 행동이라 여겼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의상이나 외형은 아니라고 판단해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외모평가에 익숙한 나를 발견하게 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어른의 멋짐을 바로 알아챈 게 아닐까 싶다.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멋짐은 직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어른의 멋짐은 다정하고 정성스럽게 반복하는 행동에서 나오는 은은한 향 같은 건 아닐까.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는 향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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