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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댈 곳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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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Jul 07. 2023

성장: 호제의 성장론 - 한글 떼기


성장(成長): 
1.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자라서 점점 커짐.
2. 사물의 규모나 세력 따위가 점점 커짐.
3. 생물체의 크기ㆍ무게ㆍ부피가 증가하는 일. 발육(發育)과는 구별되며, 형태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증량(增量)을 이른다.



초1의 1학기가 끝나간다. 40매 비닐파일을 다 채워 집에 가져왔다. 파일이 제법 두툼했다. 어떤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을까 싶어 왠지 모를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한 장씩 넘겨봤다.


손가락에 힘을 꽉 주고 색칠했을 부분, 손가락에 힘을 빼고 날림으로 적은 글자, 장난기 가득 담긴 그림들, 엄마아빠에게 서운한 마음 한가득, 엄마아빠를 좋아하는 마음 한가득, 마무리 짓지 않은 워크시트까지 다채로운 시간들이 담겨있었다.




아이가 자라는 고비마다 겪는, 정확히 말하면 엄마아빠들이 숙제처럼 여기는 ‘떼기’의 영역이 있다.


기저귀 떼기, 한글 떼기 등등등.


호제는 글을 눈으로 읽고 이해하는 기준으로 보면 한글을 뗐지만, 유창하게 소리 내어 읽기 기준으로 보면 완전하지 않고, 내 생각을 거침없이 모르는 단어 없이 써내려 가느냐의 기준으로 보면 한글 떼기는 아직이다.



노란 파일의 워크시트에 적혀 있는 글씨를 하나씩 살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엄습했다.


호제반 아이들이 글도 잘 읽고 잘 안다고 했는데 호제는 어느 정도일까, 국어가 중요하다고 난리인데 괜찮을까, 무엇보다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적어내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인 한글이 되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부모가 아이 학습에 대한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으로 손쉽게 떠올리는 건 학원이다. 제일 멀리하려는 방법이지만 가장 번뜩 떠오르는 방법인건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남들과 비교를 시작하면,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한글수업을 시작한다. 한글수업에서 더 나아가 독서논술 하나즈음은 한다. 두 개를 동시에 하는 유치부도 있다. 호제는 한글 학원, 독서논술 모두 다니지 않았다.




한껏 증폭된 불안을 살짝 숨기고 호제에게 물었다.


“호제야, 한글, 국어학원 가볼래? “

”왜? 나 못한다고?“


”아니. 못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알면 알고 싶은 거 더 많이 알고, 즐거운 거 더 많이 접할 것 같아서.“


”엄마, 난 내가 한글을 잘한다고 생각해. 학교에서 가져온 거(노란 파일) 봤지? 받아쓰기 처음에는 2개 맞았지만, 그다음에 3개, 4개, 6개까지 늘어났잖아. 그러니까 난 잘하고 있는 거야. 난 성장하고 있다고.”


(와, 정확하다. 처음에 2개 맞았다. 직접 채점을 했는지, 선생님이 채점을 하셨는지, 친구가 채점을 해줬는지 틀린 부분은 연하게 밑줄이 구불구불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 뭘 하고 싶어? 한글은 좀 하면 좋을 것 같은데. “


“그림일기를 쓸래.”


”아주 좋아! 그래, 그럼 한 문장 읽고 쓰기도 같이 해보자. 어때?“


”좋아.“




그렇게 시작한 그림일기와 한 문장 쓰고 읽기는 정성 들여 그림일기를 끝낸 금요일, 그림에 색깔이 빠진 토요일, 미니멀리즘을 구현한 일요일까지 3일 동안 이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 문장을 쓴다. 2 문장 중 한 문장은 “참 재미있었다.”이다.


그리고 월요일, 밥 먹고 뒹굴거리다 이른 시간에 잠들었다. 열과 성을 다해 주말 동안 놀았더니 월요일 저녁에는 그야말로 뻗었다.




화요일, 책을 읽다 중국인 아이가 쓰기, 듣기, 말하기 중 쓰기가 제일 어렵다는 내용이 나왔다.


“호제는 어떤 영역이 어려워? 보통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순서로 알게 된대. 호제는 지금 어때?”


“나?! (잠시 고민하더니) 난 다 안 어려운데?!”


”(!!!! 이것이 아들 육아에 등장하는 허세인가? 무한 자존심과 자존감인가? 실력과 별개로 정말 어렵지는 않은 건가? 그 무엇이건) 아~하~! 그렇구나. 와 그래. 우리 호제 멋지다. 그래 계속 가꿔가보자.”




받아쓰기의 빗줄기만 보느라 동그라미를 지나쳤던 나. 한 바닥 써 내려간 또래 아이들의 글을 보며 불안해졌던 나. 각자의 성장 속도는 다르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가 더 나아지면 된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던 나의 모순을 장면마다 마주했다.


그래, 호제야. 작심삼일도 계속하면 50일이 되고, 100일이 되더라. 꾸준히 하며 두 문장이 세 문장이 되는 기쁨을 맛보길 염원할게. 우선 일기 10개부터 채워보자.


나의 급함과 불안함은 내가 잘 녹여볼게. 호제 스스로 난 잘하고 있다고,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다치지 않게 나도 노력해 볼게.


호제의 성장론을 나의 생활에도 적용해 볼 참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수십 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아진 부분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잘하고 있다. 토닥토닥토닥.



받아쓰기 처음에는 2개 맞았지만,
그다음에 3개, 4개, 6개까지 늘어났잖아.
그러니까 난 잘하고 있는 거야.
난 성장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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