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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댈 곳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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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Apr 27. 2023

편지: 사물함 속 엄마와 암마

엄마와 암마 사이


편지(紙/片紙):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내는 글. 


드디어 학부모상담 당일 날이다. 아침 출근길, 마지막으로 학부모상담 영상을 하나 찾아봤다. 영상 속 초등학교 선생님은 학부모상담을 가서 아이의 책상이나 사물함에 편지나 간식을 서프라이즈로 남겨두는 걸 추천했다. 댓글에 경험담이 줄줄이 이어졌다. 오! 생각하지도 못했던 의식이었다.


문구점에 들러 초등학생 취향을 고려해 카드를 선택했다. 노란 바탕에 스마일 마크를 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흰색 봉투보다는 빨간색 봉투를 주고 싶었다. 카드를 샀지만 도무지 멋들어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학교 잘 다녀줘서 고마워는 나를 위해 다니는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았고, 파이팅은 뻔하고. 어릴 적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뭐였을까 생각해 보면, 아무 말 없이 안아주는 게 참 좋았던 기억만이 강렬히 떠올랐다.


이럴 땐 뭐다?! 다시 수많은 정보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김종원 작가가 인스타그램(@thinker_kim)에 부모가 자녀에게 해주면 좋은 만들을 카드뉴스 형태로 게재한다. 저장해 놓았던 게시글을 찾아 문장을 발췌해 내용을 완성했다. 카드에 그림 그리는 걸 더하는 호제의 취향을 생각해 별 그림도 그렸다. 서프라이즈 카드 준비 끝!


사랑하는 호제야
하늘에서 별이 빛나는 것처럼,
호제의 하루도 늘 빛나고 있단다.

호제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들이
호제를 근사한 곳으로 안내할 거야.

호제의 학교생활을 응원한다!

호제의 편,
엄마아빠가


아침 등굣길을 챙기지 못하는 대신 아침 등굣길 전화를 나눈다. 학부모상담을 하러 가는 날인지 알고 있는 호제는 나에게 자기가 얼마나 사물함을 잘 정리해 놓았는지 확인해 보라고 얘기했다.


“엄마 사물함에 내가 얼마나 정리 잘해놓았는지 봐봐.”


학부모상담을 가려고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몇십 분의 시간이 남아 호제 하교와 학원 등원을 맡았다. 호제는 또다시 사물함을 꼭 보라며 얘기했다.


“엄마, 사물함 꼭 열어봐 봐. 거기 내가 옷 정리한 부분 있지?”


“응, 꼭 볼게! 얼마나 깔끔하게 해 놓았는지 볼게! 꼭 볼게!”


내 말이 끝나자 뒤이어 또 얘기를 한다.


“거기 내가 편지 써놓았어.”


“뭐?! 정말?! 와!!!!!! 가서 꼭 볼게. 벌써부터 너무 감동이다. 호제도 엄마 다녀간 다음에 사물함 꼭 봐봐. (휴, 카드를 써놓길 잘했네)”


속으로 반가운 마음과 함께, 카드를 써놓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선생님과 말씀을 모두 나누고, 사물함으로 갔다. 문을 여는 순간! 기쁨을 참지 못하고, 저 멀리 칠판 앞에 서 계시던 선생님께 큰 소리로 말했다.


“(꺄악꺄악꺄악!!!!!) 선생님! 호제가 메시지를 적어두었어요!” 꼬깃꼬깃 접힌 종이와 삐뚤빼뚤 잘린 종이 조각 3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엄마는 유튜브 보고 적어가야겠다 싶었는데, 호제는 자발적으로 적었구나. 부끄러웠다가 고마웠다가 미안했다가 기뻤다가 즐거웠다가 짧은 시간에 여러 마음이 교차했다.


“(엇, 그런데 엄마와 암마 사이의 글자가 적혀있군.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 얌마가 아닌 게 어디야. “엄마, 사랑해!”를 혼자 써냈다니, 장하다!).”


오른손으로 종이 조각을 쓸어 왼손에 담았다. 종이 조각이 있던 빈자리에 카드가 든 빨간 봉투를 올려두고 사물함 문을 닫았다. 아이가 나를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엄마아빠 존재만으로 사랑해 주는 아이에게 오늘도 배운다.






이렇게 아름답게 하루가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음이 몰랑몰랑 해지도록 서로 카드를 주고받은 날 저녁. 아, 물론 호제는 아직 카드를 확인 못했을 때였다. 호제는 숙제를 하기 싫다고 슬슬 시동을 걸었다.


“그래, 힘들지? 그럴 수 있어. 숙제는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야.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하려면 하기 싫은 일, 해야 하는 일 여러 개가 같이 와. 해야 할 일과 하기 싫은 일을 해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싫은 숙제를 해내는 건 이걸 연습하는 과정이기도 해.”라고 말하는 나에게 호제는 ‘힝~’이라 고개를 휙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씩씩거리며 외쳤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엄마 너무해!!!!” 등등


나는 “우리 오늘 좋았잖아. 엄마 사랑한다고 했잖아. 이러기니.”라고 혼잣말을 하며, 의자에 앉아 호제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몇 만 원어치의 한글 읽기 책을 주문했다.


(호제야, 선생님께서 우리 호제, 책 읽기와 한글 연습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 엄마는 알아. 호제 책 잘 보는 거. 앞으로 책 볼 때, 글자도 재미있게 같이 눈여겨보자꾸나.)



사랑과 인내의 시간을 함께 선사해 준 호제야,

오늘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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