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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Mar 10. 2024

여보 나 내일 제주도 다녀올게!

여보 나 내일 제주도 다녀와도 돼?

전화 중에 잽싸게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전화 도중 생겨난 잠깐의 공백이었다. 속으로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외쳤다.

여기에는 나름의 치밀함이 있었다. 의도적으로 아내가 저녁밥을 먹은 후에 전화했다. 배고프면 가석방률도 떨어지고 더 엄한 벌을 한다는 내용을 책에서 봤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이 지식을 써먹게 될 진 몰랐지만 역시 책은 유용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답변이 안 들려온다. 뭔가 일이 잘못됐음을 느끼지만 혹시나 전화연결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려본다.


하지만 명백한 정적이다. 싸늘하다. 이런 공백이 주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난 부가 설명을 붙인다.


친구들이 오늘 제주도에 가는데 나도 뒤늦게라도 합류하고 싶다. 마침 3일 정도 쉬는 날이라서 다녀오고 싶다. 돈도 내 용돈으로 할 거다. 친구들과의 여행이 몇 년 만이다. 등등


온갖 구구절절한 내용들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마음이 상한 눈치다. 딜레이 되는 답변과 뾰로통한 특유의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다.


후회가 폭풍처럼 밀려온다. 내 띄엄띄엄 말하는 습관이 원망스러웠다. 아 좀 더 차분하게 배경설명을 했어야 했나 싶다가도 어차피 내일 가는 건데 같은 반응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도 들었다. 에잇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다.


그런데 나도 감정적이 됐나 보다. 안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안 좋으니 나도 심통이 난다.


내가 제주도에서 재충전하고 오면 그녀에게도 좋은 게 아닌가? 나는 그녀가 내일 2박 3일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참 좋은 생각을 했다며 흔쾌히 동의하고 여행자금을 지원해 줄 생각까지 있다.


그러면서 안 해도 될 말을 하기 시작한다. "여보 난 자기가 여행 간다고 하면 다 보내줬는데" 등등 내가 말했지만 최악이다.


본인이 한 것을 티 내지 말라는 내용을 무수히 들었는데 나도 했으니 너도 해라는 이 논리라니 말하면서도 빈약한 논리에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아마 통화 당시가 저녁 여덟 시에 회사에 있다는 피곤함과 여행 간다는데 호의적이지 않은 아내에 대한 서운함이 이런 내 저열함을 부추겼다.


대화는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린다. 십 분 후 아홉 시의 만나자는 말로 서로의 서운함을 뒤로 미룬다.


아홉 시가 되자 그녀의 장문의 카톡이 온다. 요컨대 너무나 갑작스럽게 말했고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닌 통보라는 느낌을 받았단다.


거기에 자기도 나름 나랑 놀라고 주말일정을 조정해 둔 건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경하니 무례하다고 한다.


이 말들을 읽으면서 크게 부정할 수가 없다. 사실 내가 간다고 하면 그녀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진 않아도 한수정도는 들고 보내줄 줄 알았다.


 그러면서 무례라는 말에서 뭔가 상황과 언밸런스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아내에게 갑작스럽게 얘기해서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이런 기회가 좀처럼 없을 것 같아서 가고 싶다고 글말미에 적었다.


이 글을 보고 그녀도 잘 다녀오라고 말해줬다. 크게 내키진 않는 눈치지만.


결국은 제주도에 왔다. 혼자 와서 미안한 마음에 자주 연락했더니 자기 지금 바쁘다고 한다. 연락 그만하고 혼자 놀고 있으라고 한다. 이렇게 바빴으면 흔쾌히 여행 보내줘도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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