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냥이 May 27. 2024

작은 이모가 내게 500만 원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연차를 쓰고 쉬는 날이었다. 오전엔 독서실에 가서 글을 썼고 오후엔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받았다. 누렇게 뜬 내 아랫니를 보며 앞으로는 치실을 해보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다짐하기도 했다. 치과에서 본가로 가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좋지 않다.


HJ : 오빠 나 작은 이모가 돈 좀 빌려 달래

도냥이 : 얼마 정도?

HJ : 한 오백정도만 빌려 달래. 카드 값이 밀렸다고.. 오늘 네 시까지 값아야 한데

도냥이 : 네 시까지? 그거 보이스 피싱 아니야?

HJ : 보이스 피싱은 아닌 것 같아.

도냥이 : 만약 진짜면 빌려주려고?

HJ :  돈은 잘 모르겠어 일단 무슨 일인지 친언니한테 연락해 보려고

도냥이 : 알았어. 연락해 보고 다시 연락 줘


통화는 이렇게 일단락 됐다. 왜 아내 목소리가 좋지 않았는지 이해가 됐다. 통화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끊고 나니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입을 맴돈다. 왜 이모가 친언니인 장모님이 아니라 딸인 그녀에게 전화를 했을까? 카드값은 무슨 이유로 밀리는 걸까?     


이런 궁금증이 쌓여가지만 해결할 방법은 없다. 있는 아내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한 시간 후에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녀다. 잽싸게 회신 버튼을 누른다.


도냥이 : 여보 잘 해결됐어?

HJ : 친언니도 잘 모르겠데. 일단 작은 이모 아들이랑 통화해 본데. 엄마랑도 통화해 봤는데 엄마도 이미 200 빌려줬데.

도냥이 : 헐 그래서 자기한테 전화한 거구나.

HJ : 응 그런 것 같아. 작은 이모 딸이랑도 통화해 봤는데, 무덤덤해 자기 엄마 일인데 생각보다 시큰둥하다.

도냥이 : 음.. 그런 일이 처음 있진 않았나 보네. 돈은?

HJ : 돈은 친언니랑 나랑 둘이 모은 가족통장으로 할 것 같아. 우리 집은 진짜 왜 그러냐 하.. 힘 빠진다.

도냥이 : 고생이 많아 여보.

HJ : 응 오빠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이로써 내 첫 번째 의문은 해소됐다. 이미 장모님이 200만 원가량 돈을 빌려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에게까지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래도 어째서 카드값이 밀렸는지에 대한 의문점은 남는다.


아내가 이런 사정까지 작은 모에게 꼬치꼬치 캐묻기는 어려웠겠지. 그래도 작은 돈도 아니고 5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빌려주는 거면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오늘 4시까지 내야 한다며 급하다며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모습은 아쉬웠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내의 엄마 그러니깐 장모님은 세 자매 중 첫째다. 그 뒤로는 큰 이모, 둘째 이모가 있다. 세 명은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산다. 첫째인 장모님은 상대적으로 잘 풀렸다. 사업도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고 애들도 다 독립한 상태다. 반면 다른 친척들은 어렵게 사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장모님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때가 많다.


큰 이모에게는 세 명의 자식들이 있다. 첫째는 얼마 전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운동 후에 집에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오토바이 사고는 보험이 안 된다고 해서 병원비는 대출받는다고 한다. 문병 간 자리에서 이 얘기를 들은 아내는 백만 원가량 되는 병원비도 없어 대출받는 말을 듣고 기함을 토했다. 둘째 아들은 몇천만 원짜리 중고차를 샀다가 엔진이 고장 나서 수리비가 없어 셋째가 할부로 냈다. 삼 남매는 부족한 생활비를 메꾸기 위해 다달이 집에다가 돈을 부치고 있다.

  

작은 이모는 두 명의 자식이 있다. 작은 이모부는 암에 걸려 항암치료 중이다. 첫째 딸은 예술 계통에서 일하고 있어 많은 시간을 근무함에도 박봉을 받고 있다. 둘째는 부품 공장에서 일한다. 가장이 일을 하지 못하니 부족한 생활비를 애들 월급으로 메꾸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이니 일이 생기면 큰일이다. 몇 백만 원이 들어갈 일이 생기면 비상상황이 된다. 자식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서로에게 빌린다. 그도 아니면 대출을 받고 대출은 다시 다른 대출로 돌려 막는다. 아내가 절망적이라고 느끼는 부분도 이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들이 힘들게 일한 돈과 시간은 이런 것들을 메꾸는데 쓰이고 만다. 현재를 위해 미래를 땡겨쓰는 셈이다.


그들은 힘들어지면 상대적으로 나은 장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마음 약한 장모님은 급하다는 말에 돈을 빌려주고 만다. 그리곤 본인이 힘들 때는 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내 아내는 이런 일이 싫다. 엄마는 거절을 못하고 결국엔 이런 것들이 그녀까지 온다. 이번에 작은 모에게서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처럼.


아내는 자신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싶은데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이 무너진다. 친척들과 인연을 단호하게 끊자니 거기에 남은 엄마가 신경 쓰인다.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 돈과 시간을 쓰자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까지 오니 친척들에 대한 적개심이 마저 생긴다. 왜 이렇게 자립하지 못하고 경제관념 없이 사는지 화가 난다. 가족 경조사에 잘 사니 네가 내라는 은근한 압박부터 부모가 돈을 빌려달라고 조카에게 전화하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는 자식, 보험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는 첫째, 돈도 없으면서 몇 천짜리 중고차를 턱턱 계약하는 둘째까지. 삶을 개선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돈만 빌려달라는 그들에게 그녀는 화가 난다.      


생각보다 이런 일이 꽤 있는 것 같다. 우리 회사 과장님도 일 안 하고 빚만 가득한 아버지 때문에 십 년 동안 번 월급을 모두 거기에 썼다고 한다. 가족, 친척이란 이름하에 자행되는 약탈이다. 우리는 여기에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 우리의 미래를 빼앗기는가.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림 출처 : Ai Copilot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부모의 삶을 되풀이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