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대응하는 법.
사람 만나는 게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예전부터 알아 왔던 사람이면 그나마 괜찮다. 과거에 함께 겪었던 일이나 근황 이야기를 하면 된다. 하지만 낯설거나 어색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문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든 떠든다. 그동안 사회생활을 헛으로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술 퍼마시며 떠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패스트푸드로 한 끼를 때운 것 같이 뒷맛이 씁쓸하다.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식상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백수일 때는 누가 보자고만 하면 봤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보자고 하면 미룰 핑계를 생각하기에 바쁘다. 결혼한 지금은 주로 아내 핑계를 많이 댄다. 다들 알아서 이해해 준다. 역설적으로 혼자 있고 싶은 분들은 결혼하면 좋다. 그럼에도 이 세상을 내 좋을 대로만 살 순 없다. 종종 원치 않는 곳에도 가야 할 때가 생긴다.
내게는 회사 동기 모임이 그중 하나다. 아예 가고 싶지 않다기보단 '굳이 내가 가야 할까?'에 가깝다. 매달만 오천 원씩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회비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나갔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겐 모임이 잡히는 순간부터 스트레스가 시작된다. 좀 더 정확히는 만나는 시간을 정하려고 카카오톡 투표를 할 때부터다. 내가 원하는 날짜에 투표를 하면서도 이 날이 안 되기를 기도한다. 만약 내가 고른 날이 되기라도 하면 '가면 어색하겠지?',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지?'등 생각들로 가기 전부터 마음이 번잡하고 소란스러워진다.
이 정도면 안 가는 게 맞지 않나 싶긴 한데 그렇다고 나가지 않을 이유는 딱히 없어서 나가는 중이다. 아직은 견딜만한 고통인 것이다. 문득 다른 사람들도 나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남들은 잘하는 것만 같은데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걸까?'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걸 싫어하나?' 그건 아닌 것 같다. 이런 이유라면 독서 모임을 두 개나 하고 있는 걸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모임은 가기 전에 스트레스를 받기는커녕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설레기까지 한다.
그리고 가서도 다섯 명이서 세 시간도 넘게 한 책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신나게 떠든다. 정신 차리고 보면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갔나 싶을 때가 많다.
이 두 모임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싶어 정리해 보니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대화의 다양성이다. 동기모임에서 나오는 주제들은 대부분 비슷하다. 주로 회사, 주변 동료들, 돈 관련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이야기에 맞장구는 치지만 즐겁진 않다. 이런 이야기들은 처음 들으면 재밌지만 점점 식상해진다.
두 번째는 대화의 깊이다. 깊이가 상대적으로 얕다. 독서모임의 경우 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다양한 주제와 더불어 각자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닿을 수 있다. 하지만 동기 모임을 할 때는 주로 피상적인 이야기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으로만 이야기가 흐른다. 속 얘기를 하려다가도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기에 섣불리 꺼내지 않는다.
세 번째는 인원수다. 다섯 명 전후로 진행되는 독서모임과는 다르게 동기 모임은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다. 인원수가 많은 만큼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다 보니 주제가 한정되고 여러 사람이 말하다 보니 깊이가 얕아진다. 세 가지 이유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동기모임에는 계속 나갈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씩 만오천 원씩 걷는 회비가 아깝기도 하고 성격상 크게 싫지 않으면 계속하는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차피 할 거라면 억지로 하는 것보단 적극적으로 하는 게 낫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모임에 나가는 것이 아닌 취재를 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기자고 어떤 사람을 인터뷰해서 기사에 써야 한다고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역할 놀이다.
이렇게 생각한 게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엄마 밥이 먹기 싫을 때 추운 길거리에서 굶주리며 동냥하는 소년이 라고 생각하고 먹었던 경험이 있다.(엄마 미안해)
이렇게 상황과 역할을 부여하니 나름 먹는 밥에 감사하고 맛있게 느껴졌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스스로에게 역할을 부여하면 같은 상황에도 좀 더 나아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관점을 바꾸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필요해서 하는 것이니 적극적이 된다. 모임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주도하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통제감을 가지고 있을 때 행복함을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거기다 실제 취재를 하려면 그 사람에게 적어도 커피라도 사주면서 물어봐야 하는 건데 그런 것 없이도 물어볼 수 있으니 개꿀이 아닐 수가 없다.
실제로 해보니 다른 점이 있었다. 전에는 가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가서도 어색하니 술만 마셔대고 언제 끝나나 시계만 보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방과 인터뷰한다고 생각하자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본질을 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가기 전에도 어떤 질문들을 할까 머릿속으로 생각해보기도 하고 가서도 적극적으로 질문한다. 여기서 대화를 통해 얻은 것들로 브런치 글을 쓰는 건 덤이다.
물론 나갈수록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괴롭다면 안 나가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상대방과 인터뷰한다라는 식으로 관점을 바꿔보는 것도 괴로움을 줄일 수 있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혹은 자기만의 역할을 부여해서 대화에 임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림 출처 : Ai Copi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