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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왜 아내는 화를 냈을까.

친절은 여유에서 시작된다.

by 도냥이

아침에 아내와 출근길을 함께한다. 같이 출근하는 건 아니고, 아내가 회사 가는 길에 도서관이 있어 중간에 나를 내려준다. 보통 아내가 운전을 해서 가는 편인데, 가는 길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많다.


다른 운전자들이 끼어들거나 늦게 가는 것 같으면 곧바로 아내의 볼멘소리와 더불어 불호령이 이어진다. 그런 모습을 조수석에서 지켜보면 조마조마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러면서 '저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분노한다고 해서 도로 위 운전자들의 매너가 갑자기 나아지는 건 아닐 텐데.


화를 내면 결국 내 기분만 상하고,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아내에게 말로 꺼내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그 화살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나름 현명한 남편이 아닌까 자부해본다.


이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아내와 함께 출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화를 내지도 않고, 끼어드는 차를 봐도 그려려니 넘겼다. '불호령 타임이군'하고 긴장하고 있던 나로서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아내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시간 여유가 있어서 그런가 봐. 평소엔 출근 시간에 쫓기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그래."


그날은 그저 '오늘은 다행히 좋은 날이군'하고 넘겼다.


그런데 며칠 후 책에서 흥미로운 심리 실험 하나를 접했다.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다.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한 그룹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강연을 하게 하고, 다른 그룹에게는 다소 뻔한 주제의 강연을 맡겼다. 두 개의 집단 중 하나의 집단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강연을 하게 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다소 뻔하고 지루한 강연을 하게 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졌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지만 사마리아인은 멈춰 서서 돌보고 치료해 주었다. 예수 시대의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존재였지만, 오히려 그런 인물이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이야기다.


다시 실험 이야기로 돌아오자. 강연 후 참가자들은 다음 강의 장소로 이동하도록 안내받았다. 이동 경로에는 일부러 도움이 필요한 상황(쓰러진 사람 등)이 연출되어 있었다.


연구자들은 누가 그 상황에 반응하고 도움을 주는지를 관찰했다. 처음 연구자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강연을 한 그룹이 더 많이 도와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두 그룹 모두 거의 비슷한 비율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실험에는 또 다른 변수가 있었다. 연구자들은 각각의 그룹을 다시 나누어 일부는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 '시간이 촉박하다'라고 알렸고, 다른 일부에게는 '시간 여유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 조건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강연 주제와 무관하게, 시간이 여유로운 그룹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울 확률이 훨씬 높았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지는 단지 도덕적 신념이나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그 순간의 '심리적 여유'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출근 시간에 쫓길 때 예민해지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여유가 없으면 타인을 이해하거나 양보하기 어렵다. 그러니 친절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여건의 문제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책 『저속노화 마인드셋』에서는 한국 사회의 여유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다는 점에서 그 현실이 드러난다. 2023년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일평균 출퇴근 시간은 72.6분, 수도권 직장인은 평균 83.2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 2019년 국토교통부 조사에서는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의 경우 하루 168분이 소요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인의 연간 노동 시간은 1901시간으로 OECD 평균(1752시간)을 훨씬 웃돈다. 독일(1341시간)과 비교하면 약 1.5배에 달한다. 이동 시간도 길고, 노동 시간도 많으니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문제는 '상대적인 여유 부족'이다. 안정된 노후가 보장되지 않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쉴 때조차 붋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야근을 하거나 퇴근을 한다고 해도 후에 학원을 다니거나 자격증을 따는 등 남는 시간은 온전히 쉬는 데 쓰지 못한다.


세 번째는 여유 시간 활용의 왜곡이다. 유튜브, 쇼츠, 먹방 등 자극적인 콘텐츠가 우리의 주의를 끊임없이 빼앗는다. 이미 피로해진 상태에서는 그 유혹을 뿌리치기도 어렵다. 결국 잠깐의 시간도 나를 회복하는 데 쓰지 못하고 흘려보낸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는 여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바쁜 건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다. 부자도 바쁘다. 모두가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간다. 그래서 도로 위엔 오늘도 클락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주 4.5일제가 화제가 되는 것도, 우리 모두가 무의식 중에 이런 현실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여유를 만들라는 말은 무책임하다. 사회가, 제도가, 구조가 시민에게 시간을 돌려줘야 한다.


그래야 조금 더 배려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친절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 『저속노화 마인드셋』, 정희원 지음, 웨일북, 2025

그림출처 : CHAT GP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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