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를 해치우듯이 하지 마세요.
예수회 정제천 신부님께서 주관하시는 ‘이냐시오 영신수련 온라인 피정’에 참여하고 있는 요즘이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기>라는 교재로 진행되고 있는데,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피정이다 보니 브라질에 사는 나도 참여가 가능했다. 어디 나뿐인가, 세계 여러 나라에 계시는 분들이 함께 같은 피정에 참여한다는 것이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알지도 못했던 이 귀한 기회가 내게 주어졌던 것은 리오바 언니의 초대 덕분이었다. 언니의 제안에 머뭇거리지 않고 응했던 것은 죽어버린 내 신앙에 작은 불씨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바램 때문이었다.
교재에 올려져 있는 순서에 따라 읽고 기도하고 답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정제천 신부님 강의를 듣고, 각자가 속한 조에서 리더의 진행에 따라 나눔 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은 진행된다.
정제천 신부님께서는 첫 강의에서 강조하셨다. 처음엔 열심일 수 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이 생기고 의문이 생기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니 ‘정신 줄 놓지 않도록’ 열심히 하느님을 붙잡고 가야 한다고.
내가 첫 모임의 나눔에서 조원분들께 드렸던 다짐은 기도를 깊이 할 줄은 모르나, 적어도 도장은 매일 찍겠다는 약속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잘 하든 못하든 매일 교재를 펴고 순서별로 ‘청하는 은총’과 ‘한 걸음 더’라는 제목으로 올려져 있는 성인의 말씀이나 짤막한 성경 구절을 읽는다. 그리고 ‘오늘의 요점’을 읽고, ‘오늘의 생각’을 노트에 적고, ‘오늘의 기도’에 올려져 있는 성경 말씀을 읽고 30분 묵상기도를 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단상’이나 ‘삶의 독해’ 부분에 나오는 질문 등에 답을 하면 하루의 프로그램이 끝나는 것이다.
도장을 매일 찍겠다고 약속을 드렸으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재를 펴고 숙제(?)를 한다. 목적이 살짝 바뀐 느낌이 들기도 했다. 숙제를 하고 도장을 찍는 것인지, 도장을 찍기 위해 숙제를 하는 것인지.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내게 맡겨진 그날의 일과를 무늬만이라도 충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쭈욱 하고 있는데, <제2주간 2일 차 하느님의 계획>에 나와 있는 ‘오늘의 요점’ 1번 문항을 보고 나쁜 짓 하다 들킨 학생처럼 뜨끔함과 함께 웃음이 빵 터졌다.
성경 기도를 숙제를 해치우듯이 하지 마세요.
그때까지는 숙제를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엄청 기특해하면서 도닥도닥 쓰담쓰담 중이었는데, “숙제를 해치우듯이 하지 마세요”라니, 완전 찬물 한 바가지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순간 이런 느낌도 들었다.
‘아니, 숙제 하 듯이 해도 되지 않나?’
‘그래도, 숙제라고 생각하니 이나마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나마도 안 할 것 아닌가’
물론, 그렇게 말씀하신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 가. ‘숙제’라는 강제성에 의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연애하듯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임을.
하지만, 나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는 ‘숙제’라는 것이 꼭 그리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만은 아니다. 너무 강제적인 것은 숨 막히지만, 검사나 검열이 있는 것이 아니어도 ‘숙제’ 내지 ‘과제’라는 타이틀을 걸어 놓으면 책임감이 생기니 좀 더 그 행위에 집중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수동적인 사람의 전형적인 행위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와우 독서 모임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2주에 한 권씩 같은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나눔을 하고 강의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그 모임에서 나의 스승은 리뷰 쓰기 과제를 ‘축제’라 부르셨다.
그 과제를 하는 동안 우리는 읽고, 생각하고, 배우고, 삶으로 익혀내며 성장으로 이어지니 즐겁게 축제처럼 즐기자는 의미였다. 나는 그 ‘축제’라는 표현을 참 좋아했다. 마치 내 삶이 축제로 가득한 느낌이 들었음이다.
나에게 와우 4기로 활동했던 그 1년은 내 인생 가장 빛나는 장면 3가지 중에 꼽힐 만큼 행복했던 시기였다. 한국에 있는 와우 팀원들은 모임에 직접 참여했지만, 지구 반대쪽에 있는 나는 mp3로 올려지는 강의를 들으며 함께 했다. 그야말로 ‘축제로 가득했던’ 아름다웠던 순간들. 아직도 선하다. 마지막 수업이 있었던 그날을. 마치 잠을 자지 않으면 그날의 마지막 수업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 우리 4기 와우 동생들과 밤을 새우며 (와우들은 한국, 나는 브라질) 이야기를 했던 기억 말이다.
나의 스승은 말했다. 마지막을 아쉬워하지 말라고. 앞으로의 더 멋진 성장을 위해 대나무의 매듭을 지은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이미 1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와우들과 함께 한 시기는 나에겐 여전히 그리움이다.
과제를 숙제로 남길 것인지, 축제로 즐길 것인지는 각자에게 달렸다. 당연히 이번 영성 피정의 기도와 교재를 따라가기를 숙제로 만들 것인지, 축제로 만들 것인지는 나에게 달렸다.
오늘 제2주간 5일 차가 끝났다. 브라질은 오늘 공휴일이라 저녁에 하면 숙제처럼 메꾸고 끝낼 것 같아 여유를 가지고 오늘 5일 차를 미리 했다. 실질 내용 상으로는 숙제처럼 했고, 기분은 축제처럼 끝냈다.
앞으로는 조금씩, 내용도 기분도 축제처럼 이어지기를 조심스레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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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car Lopez - Loving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