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이라는 긴 세월을 국가에 헌신하고 이제 막 전역한 지인 한 분이 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그분이, 하루아침에 민간인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전환된 지금의 마음은 어떨까.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오랜 세월을 뒤로하고 군인의 신분을 내려놓은 기분을 헤아려보려니, 8년 전 나 역시 비슷한 마음을 느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때의 나도 마음 깊은 곳에 차오르는 시원섭섭함을 애써 감추며, 의연하게 보이려 안간힘을 썼던. 하지만 속으로는 끝없는 공허와 낯섦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마음을 휘감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군복을 입고 살아온 날들은 단순히 직업 이상의 것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군대라는 조직은 그들의 삶 속에 뿌리처럼 박혀 있어, 쉽게 떼어낼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새벽녘 나팔 소리에 맞추어 눈을 뜨고, 철저한 규율이 적용되는 울타리 속에서 살아간다.
매일의 습관이 누적되며 형성된 정체성은 단순한 옷 한 벌을 벗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 속 깊이 자리 잡은 일종의 삶의 방식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그들만의 언어였다. 그래서일까, 군복을 벗는 그 순간, 비로소 군인의 이름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마냥 홀가분할 수만은 없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설렘과 함께 묘한 공허함을 동반한다. 하루아침에 바뀐 신분, 잘 길들여진 익숙함에서 벗어난 자유는 오히려 더 큰 공허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침마다 군대의 일과에 맞춰 움직이던 그분이 이제는 민간인의 신분으로서 어떻게 하루를 시작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는 이 시기는 분명 혼란스럽고 아득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군복을 벗는 순간, 더 이상 입을 일이 없는 입을 수 없음을 아는 순간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그간의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새로운 신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와의 수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그 대화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다독이며 비로소 새로운 삶의 한 걸음을 내딛게 되겠지. 이 과정은 남이 아닌, 오직 스스로가 해내야 하는 숙제이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도, 누구도 그 마음의 무게를 대신 지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언젠가는 그 길의 끝에 서서, 군인이었던 시간과 민간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그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리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오롯이 자신을 마주해야 할 때이다. 그 길을 걸으며 삶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품기를, 그러면 그곳에서 더 깊어진 스스로와 만나게 될 것이다."
한동안 잊혀 지냈던 마음과 마음을 다시 소환해 들여다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