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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자리를 꿈꿨지만, 그곳은 더 뜨거운 전장

책임회피의 대가

by 서담


군 생활에서 소대장이라는 직책은 보통 1년 남짓이다. 그 뒤에는 대부분 참모 장교로 보직이 바뀐다. 나 역시 그 순환의 길 위에 있었지만, 나의 시작은 조금 달랐다. 전입 오자마자 태권도 교관과 유격 교관 임무를 연이어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작 소대장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해본 시간은 고작 3~4개월 남짓이었다.


소대장으로서 한 달에 주로 주간 훈련을 하지만, 더해 야간 전반야, 철야 훈련이 항상 있다. 젊다고는 해도 매주 반복되는 체력적 압박은 적지 않았다. 소대장 본연의 책임 외에, 대대가 요구하는 굵직한 임무까지 수행하다 보니 속으로는 ‘조금만 편했으면’ 하는 바람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곤 했다.


그런 마음이 차오르던 어느 날, 야간 철야훈련 준비를 위해 교보재 탄약을 수령하러 대대 작전과를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낯선 장면 하나를 목격했다. 훈련장을 누비며 땀을 흘리는 나와 달리, 시원한 사무실 안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교보재를 불출해 주는 선배 장교의 모습. 그의 얼굴은 하얗게 빛났고, 손끝은 깨끗했다. 여느 회사에 다니는 흡사 회사원 같았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저게 진짜 편한 자리구나.”


그날 이후 나는 틈날 때마다 대대본부 간부들과 접점을 늘렸다. 때로는 중대장에게 은근히 어필하기도 했다.

“대대 작전과에서 업무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대에 있는 소대장 12명 가운데, 태권도·유격 교관까지 겸직하며 대대 임무를 가장 많이 수행했던 내 경력을 대대도 알고 있었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마음속 설렘이 커졌다.


그러던 와중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원하던 대대 참모 보직으로 명령을 받았다. 꿈에 그리던 자리였다. 서류와 지휘통제 속에서 조금은 숨을 고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건 철저한 나의 허황된 착각이었다.


내게 주어진 보직은 대대 교육장교, 전시에는 지상에서 전투기 유도임무를 병행해야 해서 작전항공장교라고도 불린다. 내가 상상했던 편안한 자리가 아닌 대대 내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많은 업무가 쏟아지는 자리였다. 야전의 먼지가 사라지는 대신, 끊임없이 밀려드는 훈련 계획과 교육 통제, 문서 작성, 여단과 군단으로부터 내려오는 지시와 보고로 24시간 가득 찼다.


밤을 지새우는 건 훈련장에서만이 아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펼쳐진 전술교범과 보고서 더미 속에서도 새벽을 맞이했다. 종이 위에 검은 글씨를 찍어내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늘 ‘이 보고가 전술적으로 문제는 없는가, 누락된 사항은 없는가’라는 압박으로 나의 심장과 머리를 조여왔다. 손에서 담배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사무실은 편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보이지 않는 훈련장이었고, 각종 서류와 훈련계획이라는 무기를 다루는 또 다른 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운 것은 많았다. 훈련의 땀방울로만 쌓이는 것이 리더십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획하고 조율하며, 남들이 모르는 무게를 짊어지는 것도 군인의 책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소대장 시절에 병사들과 함께 흙바닥을 뒹굴며 배운 것을, 참모 장교 시절에는 도표와 명령, 지시문서 속에서 다시 배웠다. 성격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


돌이켜보면, 나는 처음 그 자리를 꿈꾸며 ‘편안함’을 찾았다. 하지만 정작 마주한 것은 또 다른 무거운 책임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땀이 아니라, 밤샘과 정신적 압박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무게를 견뎌낸 덕분에, 나는 군인의 길에서 한층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편한 자리를 바랐지만, 결국 어디에도 편한 자리는 없었다. 군대에서, 그리고 인생에서도.


“책임을 피해 선택한 자리는 없다. 다만 책임을 다른 모습으로 배우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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