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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의 체험

위기는 곧 기회

by 서담

사람은 때로 극과 극을 오간다. 기대와 환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실망과 좌절이 덮쳐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다시 한 줄기 빛이 비쳐온다. 나의 첫 참모 생활은 바로 그 극단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소대장에서 대대 참모로 보직이 바뀌던 날, 나는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소대를 이끌며 앞에서 뛰던 역할에서 벗어나, 이제는 대대의 전체 작전과 교육을 기획하고 지원하는 자리였다. 그 변화는 단순한 자리 이동이 아니라, 장교로서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도 문서로 작전을 설계하는 참모 장교다.’


내심 뿌듯했고, 새로운 업무를 잘 해내고 싶다는 열정이 샘솟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보직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퇴근을 불과 몇 분 앞두고 있던 나에게 부서장, 대대 작전과장이 불쑥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군단장님께 대대장님이 연구 강의를 하셔야 한다. 필요한 실습계획표랑 기획안을 오늘 밤 안에 만들어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연구 강의라니? 그것도 군단장 앞에서?


나는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만들어야 합니까?”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그런 거는 교범에 다 있어. 이거 참고해서 해.”


그는 10여 권이 넘는 두꺼운 야전 교범을 내 책상에 던지듯 놓고는, 전투복 깃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난 약속 있어서 먼저 나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퇴근하는 그의 뒷모습은 묘하게도 가볍고, 나에겐 벼랑 끝에 혼자 남겨진 듯한 무거움만 남겼다.


소대장 시절, 나는 병사들과 함께 뛰며 직접 몸으로 부딪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나 참모의 자리는 머리와 손끝에서 결과가 나와야 했다. 야전 교범을 아무리 펼쳐 보아도,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계획서가 되어야 하는지는 감조차 오지 않았다.


“대대장이 군단장 앞에서 강의를 한다… 그걸 내가 만든다고?”


머리는 하얗게 비어갔다. 밤새 책장을 넘기고 노트를 펴고, 생각을 짜내려 했지만 한 줄도 제대로 써 내려가지 못했다. 책상 위에 쌓인 커피잔과 흐릿한 눈빛만이 나의 무력함을 증명할 뿐이었다.


예견된 일 아침, 대대 작전과 사무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작전과장은 이미 폭발한 상태였고, 나를 향한 그의 호통은 폭풍 같았다.


“이게 보고서야? 이게 계획서냐고! 밤새 뭐 했어, 너 장교 맞아? 또라이야? "


책상 위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나뒹굴었고, 모욕적인 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전날의 자부심과 기대감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참모의 길은, 단순히 소대장의 연장선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다행히도, 몇 달 뒤 작전과장이 교체되었다. 새로 부임한 과장은 전 과장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내게 서류 작성의 원리를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보고서는 글자가 아니라 체계다. 흐름을 먼저 잡아라. 군의 문서는 결국 지휘관이 결심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하는 거다.”


그는 보고문서의 형식, 분류, 관리, 그리고 표현까지 세세하게 지도했다. 어떤 때는 직접 작성한 내 문서를 고쳐주며, 문장 하나에도 의미를 담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점차 깨달았다. “문서는 곧 힘이다.”

지휘관의 한마디를 뒷받침하고, 수백 명의 병력 움직임을 조율하며, 때로는 대대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하는 것. 그것이 문서의 무게였다.


돌이켜보면, 불성실한 과장과 헌신적인 과장을 연달아 만난 경험은 내게 양극단의 수업이었다. 첫 번째 과장은 좌절과 무기력을 안겨주었지만, 두 번째 과장은 참모의 길을 보여주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무너질 수도, 성장할 수도 있다. 나의 군 생활 역시 그 극과 극의 경험 속에서 비틀거렸고, 또 바로 섰다.


그때 배운 교훈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한 장의 보고문서는 곧 군의 신뢰이고, 장교의 얼굴이다.”


참모로서의 첫걸음은 비참하게 시작했지만, 결국은 그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때의 혹독한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보고서 한 장도 자신 있게 쓰지 못하는 장교로 남았을 것이다.


“위기는 성장의 다른 이름이다.”


그때의 나처럼 누군가 지금 막막한 자리에 놓여 있다면, 감히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 좌절 끝에 반드시 배움이 있고, 언젠가는 그것이 당신의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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