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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땀, 전장의 교훈

참모역할의 시험대

by 서담

나는 군 생활 동안 수많은 훈련을 겪었지만, 그중에서도 95년 호국훈련은 내 삶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름만으로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 훈련은 단순한 부대 차원의 훈련이 아니었다. 육·해·공군이 함께 맞물려 움직이며, 전시의 전장을 실제처럼 구현하는 전구급 대규모 훈련. 준비만 무려 6개월이 걸렸고, 실기동은 2주 동안 이어졌다.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나는 대대 작전과장을 보좌하며 세부 훈련계획을 담당했다. 장갑차와 전차가 전장을 가로지르듯 장거리 기동하는 계획, 병력 이동 동선, 교보재와 장비 불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치밀해야 했다. 낮에는 현장을 뛰며 점검했고, 밤에는 야전침상에 잠시 몸을 뉘었다가 곧장 책상 앞으로 돌아와 문서와 씨름했다. 집에서 가족과 저녁을 함께하는 시간보다, 부대에서 불 꺼진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날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흘린 땀은 고스란히 종이 위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언제나 평탄하지 않았다. 한 번은 점심을 급히 해결하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훈련계획 문서를 기무부대 요원이 압수해 간 일이 있었다. ‘비밀’ 등급이 적힌 문서를 방치한 내 실수였다. 그날 오후, 나는 기무부대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총알보다 무서운 건, 보안을 잃는 순간이다.”


훈련 출발 당일,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 가던 시점. 아이러니하게도 내 몸이 버텨주지 않았다. 고된 일정이 쌓이고 쌓여 몸살감기가 나를 덮쳤다. 선발대 책임으로 차량에 선탑해야 했지만, 모포를 뒤집어쓴 채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차량 안에서 혼절했다. 훈련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차량 선탑자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로 경고장을 받았다.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훈련은 멈추지 않았다.


2주간의 훈련은 전장의 축소판이었다. 텐트를 치고 걷는 일을 반복했고, 위장크림으로 가려진 얼굴은 씻을 틈조차 없었다. 물티슈로 대충 얼굴과 팔을 닦고, 군장을 베개 삼아 쓰러져 잠드는 생활. 낮에는 햇볕에 지쳐 쓰러질 듯했고, 밤에는 한기를 이겨내며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그 속에서 나는 가슴 깊이 새겼다.

“평시의 땀 한 방울은, 전시의 피 한 방울보다 값지다.”


힘든 와중에도 배움은 분명했다. 참모의 자리란 단순히 문서를 쓰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 한 장의 계획서가 수백 명 장병의 움직임을 바꾸고, 그 움직임이 훈련의 성패를 가른다는 사실. 문서는 곧 생명과 직결된다는 걸 알았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그러나 내 안에는 묘한 성취감이 피어올랐다. 고열로 쓰러졌던 순간도, 경고장을 받으며 고개 숙였던 경험도 결국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훈련의 고통은 순간이었지만, 교훈은 평생을 지탱했다.


95년 호국훈련은 단순한 군사훈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참모 장교’로서 지켜야 할 책임과 자세를 가르쳐준 시험대였다. 지금도 그 시절의 메아리가 귓가에 울린다. 장갑차 엔진의 굉음, 야전침상에 스며든 땀 냄새, 텐트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 그 모든 풍경은 아직도 내 군 생활의 한 페이지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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