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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Aug 13. 2023

사랑이라는 착각

<엄마, 난 도망갈 거야>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 클레먼트 허드 그림

그림책 <엄마, 난 도망갈 거야>는 1942년 처음 나와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그림책이다. 엄마 토끼와 아기 토끼의 숨바꼭질 놀이를 담았다. 아기는 장난 삼아 어디로든 도망치겠다고 말하고 엄마는 그럴 때마다 끝까지 따라가 찾아내겠다고 한다. 그야말로 엄마의 사랑을 담뿍 담은 그림책이다.    

 

하지만 엄마 토끼와 아기 토끼의 말과 행동에서 의식을 조금 걷어내면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다. 아기 토끼는 ‘도망가고 싶다’고 말하고 엄마는 귀여운 아기가 도망가도록 놔둘 생각이 없다. 적어도 아기 토끼의 무의식에서 이건 놀이가 아니다. 아기는 숨을 테니 찾아보라고 하지 않고 도망가겠다고 말한다. 찾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거다.      


<엄마, 난 도망갈 거야>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 클레먼트 허드 그림

아기 토끼는 엄마에게 도망치겠다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아기 토끼는 왜 엄마 토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할까?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가야 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아기 토끼는 엄마로부터 도망친 후 물고기가 되고 싶기도 하고, 높은 산의 바위가 되고 싶기도 한다. 엄마 곁에서는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아기 토끼가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상상할 때마다 엄마는 집요한 방해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고기가 되면 낚시꾼이 되어 잡겠다고 하고 바위가 되면 등산가가 되어 정복해버리겠다고 한다. 아무도 모르는 꽃밭에 가서 꽃이 되고 싶다는 아기 토끼에게 엄마는 정원사가 되어서라도 기필코 너를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말한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영역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아기 토끼의 말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엄마 곁에서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겠냐는 거다. ‘아무도 모르는 영역’, 나만의 영역은 독립적인 주체 형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간의 확보인데 그걸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엄마’의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다. 완벽한 이미지와 운동 능력이 완성되려면 적어도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 엄마는 모성적 대타자로서 아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먹을 것, 입을 것, 배변 처리를 비롯해서 충동의 만족까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엄마 자신이 진짜 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는 벽에 부딪히고 아이는 불만이 생긴다.(사실 요즘은 자본주의의 풍요 때문에 이 시점에 변수가 너무 많다) 그때가 아이를 놓아주어야 하는 때다. 그리고 그때가 아이가 엄마 곁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때다. 그럼에도 엄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들고 싶고 아이도 엄마 곁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기 쉽지 않다.   


그림책에서 아기 토끼는 엄마를 벗어나 세상에 나가겠다는 의지를 계속 드러낸다. 하지만 번번이 앞을 막아서는 엄마 때문에 결국은 마음이 꺾인다. 작은 돛단배가 되어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겠다는 아이를 바람이 되어서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기어코 밀어야겠다고 말하는 엄마! 결국 아이는 어떻게 해도 엄마로부터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달아나길 포기한다.      


“치, 난 그냥 이대로 있는 게 낫겠어.”

엄마는 그제야 안심한 듯 아기 토끼에게 맛있는 당근을 내어 주며 미소 짓는다. 온갖 과일과 채소가 가득한 나무 둥치 안 토끼 굴에서 당근을 권하는 엄마 토끼와 그걸 받아먹으려는 아기 토끼가 그려진 마지막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아기 토끼는 전보다 한층 더 아기 같아졌고 토끼 굴은 아늑하지만 폐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엄마의 자궁처럼. 결국 아기 토끼는 세상으로 나아가 스스로 욕망하는 주체가 되기보다 퇴행을 선택했고 엄마의 세계에 갇히고 만다.


엄마가 아기 토끼를 따라다니는 건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기 토끼가 행여 다칠세라, 행여 길을 잃을세라 노심초사하는 엄마! 하지만 이러면 아이는 성장할 수 없다. 엄마의 품에 갇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인 채로 남게 된다. 이게 진정한 사랑이 아님은 우리 모두가 잘 안다. 그런데도 막상 엄마 입장이 되면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 잊게 되는 것 같다. 필요할 때 아낌없이 주고 때가 되면 냉정하게 놓아주는 것! 그게 엄마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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