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오 고베티, 미켈레 리차르디 <커지고 커지고 커지고>
클라우디오 고베티, 미켈레 리차르디 <커지고 커지고 커지고>
그림책 <커지고 커지고 커지고>는 드물게 2인칭 시점으로 쓰여졌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주인공이 '너'인 걸 알면서도 '그 일'이 '너'뿐 아니라 '나'와도 무관치 않다고 느끼게 된다. 때문에 읽는 내내 독자의 마음은 편지 않다. 2인칭 시점이 독자로 하여금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학교에 가기 전 ‘너’는 행복한 아이였다. 엄마의 다정한 눈빛, 아빠의 따뜻한 미소 안에서 마냥 사랑받는 아이. ‘너’는 새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들뜨고 새로운 것들을 배울 생각에 신나고 그러면서 키도 금방 클 거라는 기대를 안고 학교에 간다.
너는 교실에도 겨우 들어갈 만큼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 좀 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친절해 보이는 아이들과 빨리 놀고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좋지 않았다.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면서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임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 ‘너’는 없었다. 그림자처럼 아이들 속에서 소외됐다.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 컸는데도 아이들은 ‘너’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외면했다.
‘너’는 집에 가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성적이어서 그랬을까? ‘너’만을 사랑하는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싶었던 꿈은 산산히 부서졌지만 ‘너’는 혼자여도 괜찮다고 매일매일 스스로를 달랬다.
2월이 되니 아이들이 서로를 놀리기 시작했다. 파올로는 안경을 쓴다고 놀림을 받았고 네눈박이, 두더지란 별명도 생겼다. 조반니는 치아교정기 때문에 철가면, 철테 입, 철물점이라 불렸다. 안나는 키가 크고 말라서 또 놀림을 받았는데 가로등, 그리니시 아니면 기린이란 별명이 붙었다.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이 조금 크다고 놀림을 받았다. 공, 고래 아니면 열기구란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놀림도 별명도 시작은 안젤리카였다. 다른 친구들도 ‘너’와 같은 대접을 받지 않기 위해 안젤리카와 한패가 됐다. ‘너’의 고립은 더 심해졌고 그래서 더 슬퍼졌다. 고래, 열기구, 뚱뚱이, 대왕미트볼 등 ‘너’를 부르는 수많은 별명이 네 안에 들어와 자꾸자꾸 몸집을 불렸다.
‘너’는 그 슬픔을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다. 심지어 아이들의 놀림 속에 너를 방치했다. ‘너’ 스스로도 너무 크고 뚱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젤리카를 선봉으로 아이들은 그 그룹에서 밀려날까 봐 ‘너’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아이들의 표정에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네가 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하지만 모두 널 놀리는데 나만 빠질 순 없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나도 유쾌하진 않아... 그런 복잡한 속내를 읽을 수 있다.
매일 놀림을 당하고 못된 말을 듣고, 따돌림을 당하면서 ‘너’의 불행은 더욱 커져갔다. 그래도 ‘너’는 그런 괴로움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너’의 자아는 ‘너’의 슬픔을 꾹꾹 누르고 억압해서 잊혀지게 하는 게 최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너'의 자아에게 억압된 불행의 시니피앙들은 증상이 되어 찾아왔다. 너의 몸은 매일매일 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학교 지붕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동안 ‘너’를 괴롭혔던 말들이 에너지가 되어 모두가 콩알만 해질 때까지 너의 몸집을 불렸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도망갔다. 왜 ‘너’의 몸이 커졌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들은 도망갔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안젤리카만이 벌벌 떨며 네 손아귀에 잡혔다.
“왜 그렇게 나를 놀린 거야?”
“나, 나, 나도... 몰라. 그냥... 재미 있어서...”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워 울어버릴 만큼 ‘너’의 몸은 커졌는데, 그렇게 ‘너’를 변하게 만든 안젤리카의 대답은 너무 허무했다. 그 대답을 듣고 ‘너’는 몹시 실망했다. 재미라니? 너희들의 재미 때문에 나는 죽을 만큼 힘들었던 거야?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떻게 그렇게 고통을 줄 수 있지?
여기서 그림책은 너무 착한 길을 택하고 만다. '너'는 모두에게 버림받고 벌벌 떨고 있는 안젤리카를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친구로부터 외면받고 철저히 고립되어 유령처럼 혼자 떠돌았던 경험이 너무 처절했던 ‘너’의 의외의 선택이었다.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용서를 선택을 하고나자 '너'의 몸은 줄어들었다. '너'의 증상을 가라앉힌 건 '너'였다. '너'의 상처는 누구의 도움도 아닌 스스로의 '납득'에 의해 아물어야했다. 씁쓸하다. '너'의 선택에 아이들은 일순간 안도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너'를 또는 누군가를 놀릴 것이다. 너무 쉽게 용서받은 탓이다. 안젤리카와 친구들이 '너'의 진심을 알아주고 스스로 뉘우칠 획기적인 한방이 그림책에는 없다. 해피엔딩은 '너'의 삼킴에 의해서만 완성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를 속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가 쉽겠는가?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현실에서 따돌림의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머리를 모아 오래도록 고민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