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영 Aug 13. 2019

음악계의 '헬페미'들


  '100명의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100개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말 만큼, 세상엔 여권의 신장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연대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고,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행하는 다양한 실천들은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것보다도 여성 문제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라면 현재의 '느리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불만을 느낄 지도 모른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당당하게 외치는 태평양 건너의 숱한 여성 뮤지션들은 왜 저런 실오라기 옷을 걸친 채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것인지, '백래시'에 대한 문제 의식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인지 혹은 오히려 퇴보한 것인지. '탈코르셋' 담론이 점화되고, 사회적 여성성을 타파하기 위해 직접 들고 일어선 한국의 여성들은 고착된 여성스러움 그대로 답습하며 이에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 하는 듯 보이는 그들을 보며 불만과 씁쓸함 내지 오만 가지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면 됐지, 뭘 더 바라는가' 하며 다독이는 반응이 자연스레 딸려온다면 결국 씁쓸함은 배가 될 뿐이. 하지만 슬퍼하지 말자. 세상은 넓고, 국외에도 역시 '탈코르셋'의 방향성을 온몸으로 체화하 '헬페미'들이 있다. 긴 머리를 싹둑 잘라내기도 하고, 널널한 티셔츠에 운동화를 착용하고, 쿨하고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성적대상화의 여지를 거세하고, 세상에 팽배한 사회적 여성성과 젠더 룰을 사정없이 풍자하는 여성 뮤지션들이 있다. 물론 페미니스트로서의 모습 이전에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음악을 들려주는 훌륭한 아티스트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탈코르셋'이라는 공통의 슬로건을 외치진 않더라도 그 목적성과 방향성이 우리와 같은 축을 이루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온통 '코르셋' 투성이인 세상에 힘이 빠지는 하루라면,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떨까. 어딜 가든 우리에겐 아군이 있고, 같은 속도로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자매들이 있다. 찾아볼수록 그 머릿수는 많고도 많지만, 유독 혼자 알기 아까운-또한 한국의 인지도는 터무니없이 낮은- 다섯 명의 국외 아티스트를 소개한다.



피버 레이(Fever Ray) 


  남매로 이루어진 스웨덴의 일렉트로닉 듀오 더 나이프(The Knife)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카린 드레이예르(Karin Dreijer). 그는 솔로 프로젝트인 피버 레이(Fever Ray)를 통해 더 나이프보다 더 실험적이고 내밀한 '소리 예술'을 시도하며 왕성한 창작 욕구를 발휘하고 있다.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일렉트로닉 사운드, 부서질 듯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목소리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몸짓 하나하나 뇌리에 각인시키는 라이브 퍼포먼스 또한 그만의 시그니처가 되어 많은 추종자를 생산해냈다. 두 번째 정규 앨범 <Plunge>의 발매와 함께 금빛 머리칼을 잘라낸 그는 이전보다 더욱 정치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스탠스로 청자와의 거리를 좁혀나가고 있다.


Fever Ray: on pleasure, patriarchy and political revolution https://www.theguardian.com/music/2017/nov/18/fever-ray-pleasure-patriarchy-political-revolution-plunge-karin-dreijer



코트니 바넷(Courtney Barnett) 


  호주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코트니 바넷은 왼손 잡이 핑거 스타일과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능숙하게 표출해내는 아티스트다. 시니컬하면서도 재치있는 가사, 록킹한 무드, 삶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와 유쾌한 시선, 슬래커스러운 음악을 표방하지만 희희낙락한 슬래커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부조리함에 직면하는 그의 음악은 듣는 이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가장 최근 발표한 2집 <Tell Me How You Really Feel>에는 일상적 이야기에서 출발해 페미니즘으로 귀결되는 직설적인 메시지를 굵직하게 담아냈다. 얼마 전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을 통해 첫 내한 공연을 가졌는데, 그의 무대를 본 이라면 뮤지션의 움직임을 따라 넘실대는 머리칼, 음원으로 들을 수 없었던 거친 그로울링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Courtney Barnett Talks About Taking on Misogyny and Self-Doubt With Her New Album https://pitchfork.com/features/interview/courtney-barnett-talks-about-taking-on-misogyny-and-self-doubt-with-her-new-album/



킴 고든(Kim Gordon)


  80년대 미국 인디 록 씬과 '노 웨이브(No Wave)'의 대표주자 소닉 유스(Sonic Youth)의 보컬 및 기타리스트. 그는 수많은 현 세대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있어 선망과 동경의 대상, 롤 모델이기도 하다.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을 듯 뚜렷하고 강하면서도, 이지적인 눈빛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성적인 목소리와 거칠고 반항적인 연주 스타일은 소닉 유스라는 밴드의 정체성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가 펴낸 저서 <Girl In a Band>는 제목만 봐도 추측할 수 있듯 록 음악 씬의 한 가운데 위치한 여성으로서 고든의 솔직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악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면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Kim Gordon: The Godmother of Grunge on Feminism in Rock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news/kim-gordon-the-godmother-of-grunge-on-feminism-in-rock-184535/



스네일 메일(Snail Mail)


  현 미국 인디 씬에서 주목하고 있는 밴드이자 린지 조던(Lindsey Jordan)의 솔로 프로젝트. 마타도어 레코즈를 통해 발매한 1집 <Lush>는 대중과 평단 모두의 열광을 이끌어내며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70년대의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에서 출발하여 소닉 유스와 페이브먼트(Pavement),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 등 90년대 록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면서도 현 세대의 감성을 캐치해낸 사운드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리즈 페어(Liz Phair), 피오나 애플(Fiona Apple), 캣 파워(Cat Power) 등 여성 음악가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밝힌 만큼 그들이 일구어낸 여성주의적 흐름 또한 자연스레 구현하고 있으며, 21세기를 살아가는 20대 초반의 시선으로 여성 문제에 대한 생각을 전개한다. 늘 편안한 차림으로 노래와 연주에 집중하는 그는 음악을 하는 현재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는 걸 몸소 표현한다.


Snail Mail Is A Songwriter, Not Just Another Girl In A Band https://www.refinery29.com/en-us/2018/06/201337/snail-mail-lindsey-jordan-women-in-music-ghetto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


  2집 앨범의 수록곡 'Nothing Compares 2 U'로 90년대 이름을 알린 아일랜드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그는 훌륭한 뮤지션을 넘어 삭발 머리와 반골기질의 저항 정신, 그리고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로 길이 기억될 아티스트이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외모가 오히려 음악을 전달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된다며 머리를 깎아낸 이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삭발 머리가 바로 그의 기지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반여성주의 뿐만 아니라 극단적 상업주의와 소수자 차별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각종 시상식과 방송 출연, 공연을 거부하는 등 유명인으로서 따라붙는 논란을 감수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에는 기행으로 여겨졌을 지 몰라도 그의 음악적 성취, 사회적 행보는 후대의 많은 여성 아티스트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에겐 '큰형님'이 아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