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길었던 가을은 가고 벌써 12월의 셋째 주가 되었다. 미애는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출장을 마치고 집에 오는 남편 맞이를 하느라 분주하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하고, 집안 먼지도 털고, 이불도 모두 꺼내 깔끔히 빨았다. 슈퍼에 가서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로 장도 보았다. 그즈음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은 현구는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집안 여기저기를 정리하고, 장인어른께 드릴 선물도 사고, 여행 가방들을 싸느라고 바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평일 오후 미애는 저녁 비행기로 도착하는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아침부터 장거리 운전을 해서 인천 공항에 갔다. 지난번처럼 주차한 곳을 기억하지 못해서 헤매지 않도록 주차 구역을 메모해 놓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현구는 가족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마치고 나왔다. 현구는 배웅을 나온 인파 속 저만치서 활짝 웃고 있는 미애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뒤에서 키가 큰 남자가 현구를 스치고 지나가더니 달려가 미애를 끌어안았다. 멍하니 서 있는 현구에게 아내가 괜찮냐고 물었다. 미애의 남편과 미애는 키스를 하고 수화물을 찾아 공항을 빠져나갔다. 현구와 아내는 택시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며칠 후면 처갓집 식구들을 만나러 미애가 사는 도시로 갈 현구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집으로 돌아온 미애는 남편과 신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연극이나 음악회 관람을 하느라 바빴고, 저녁에는 남편과 산책을 하러 갔다. 미애가 매일 혼자 걷던 산책로를 남편과 걸으며 코스마다 정확한 거리를 확인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항상 그냥 지나쳤던 한옥 커피숍에 들러 남편과 같이 차를 마셨다. 성격이 밝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미애의 남편은 미애에게 좋은 수다 상대였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마친 미애를 남편은 가볍게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서울에서 며칠을 보낸 후 현구는 가족들과 장인어른을 뵈러 지방으로 내려갔다. 처갓집 식구들에게 문안 인사를 마친 후 현구는 미애를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먼저 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전에 페미니즘에 대해 어색한 토론을 한 이후로 둘은 아무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미애가 매일 운동을 한다는 것을 아는 현구는 산책로에서 우연히 미애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장인어른의 집은 산책로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아내에게 잠시 바람 좀 쐬러 간다고 얘기를 하니, 아내는 이 추운 날 무슨 바람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현구는 못 들은 척하고 밖으로 나왔다. 산책로에 도착해서 매일 미애가 지나치는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얼마 안 있어 저 멀리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오는 연인이 보였다. 키가 큰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여자에게 뭐라고 하니, 여자는 깔깔깔 웃었다. 남자는 여자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 손을 잡고 걸어갔다. 둘만의 세계에 빠져서 연인은 주위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미애는 다시 현구를 지나쳐갔다.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현구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현구는 다시 발길을 돌려 장인어른 댁으로 향했다. 현구는 장인어른의 아파트 입구에 있는 빵집에 들러서 케이크를 둘러보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와 아내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 중에 어떤 걸 살까 고민하다가 그냥 둘 다 사서 양손에 들고 장인어른의 아파트로 향했다. 장인어른이 살고 계신 101동 앞에 다가가니 어느새 하늘에서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현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혼자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