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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Jul 10. 2021

리버스 멘토링

파워포인트 걸 따라잡기

부러운 파워포인트 능력자들


우리 본부에는 파워포인트 삼대장이 있다. 

감각과 스피드가 손끝에 살아 있는 10년 차 아래 주니어들이다. 

어디서 본 적 없는 크리에이티브하고 임팩트 있는 슬라이드 전개가 강점인 A,

컨설팅 문서처럼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슬라이드에 강한 B,

감각적이고 세련된 슬라이드에 능한 C.


별 것 없는 내용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엄청난 기획서로 변신한다는
전설의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C의 스타일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가장 고급감이 있고, 

논리적이되 그리 디테일에 강하지는 않은 나의 기획서 스타일과도 잘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원한다고 다 매치되는 것이 아닌지라, 조용히 기회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연초.

C와 같이 페어로 일할 기회가 갑자기 왔다!!

물론 기획 업무는 슬라이드 구성이 다가 아니다. 

그런데 같이 일해보니 이 아이는 

고민을 깊게 할 줄 알고, 말귀를 잘 알아들었으며, 게다가 아이디어도 좋았다.

그리고 슬라이드 구성은 그야말로 화룡점정.

줄줄줄 말로 쓰여진 스크립트 형태인 워드 파일 기획서를, 

강약이 있는 적절하고 세련된 슬라이드로 구현하는 파워포인트 능력.


프로젝트는 세상 딱딱한 ‘타이어’ 브랜드 전략이었지만, 우리 둘의 케미는 나쁘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스탭들과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도 높았다.

즐겁게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다시 한번 협업의 기회가 왔다.

(이건, 그 아이도 나와 일하는 게 싫지 않았다는 의미다.

주니어가 싫어하면, 같이 페어로 일하지 못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니 나름 공정하다.)


이번에는 전자제품 리테일 전략 업무였다.

그 첫 단계로, 실제 매장에 가서 

주요 코너별로 판매원과 소비자를 만나 만족이나 불만족 사항을 직접 들은 후,

나름의 프레임으로 그것을 잘 정리하는,

의미는 있지만 세상 재미없는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직접 매장 몇 군데를 같이 돌며 

현장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하고, 

오가는 택시 속에서 대화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나름 친해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일차 보고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멘토링 요청

내가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모든 슬라이드 작업을 네가 혼자 하는 것보다, 우리가 같이 나눠하면 어떨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결국, 

나에게도 그 고급 기술을 가르쳐 달라는 이야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 아이는

“네, 그럼 내일 아침에 회의실 잡을게요” 했다.

옳거니!!


다음날 아침,

C는 자신이 준비해온 문서 하나를 조심스레 열었다.

파워포인트 기초기술 몇 가지를 직접 정리한 문서였다.

png 파일 받기, 구글 슬라이드 활용법 같은.

요즘 아이들은 당연히 아는 것이겠지만,

옛날 아재식 파워포인트밖에 만들 줄 모르던 나에게는 아주 유용한 스킬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종합 예제.

한번 같이 했던 타이어 문서를 

처음부터 어떻게 작업했는지 조곤조곤 일러주기 시작했다.


감동의 물결.

아, 이 착하고 좋은 아이를 어떡하지?

내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왔다.


이제는 내 차례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학생인지 보여주마.

앞뒤로 나눠서, 앞 파트 작업을 시작했다.

내가 맡은 분량은 2~30퍼센트 정도?로 양 차이가 나긴 했지만, 어쨌든 배분은 배분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 내에 눈 빠지게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일찍 나와 조심스레 마무리 수정을 한 후 C에게 메일을 보냈다.

첨삭 수정 부탁한다고.


그리고 그날 저녁, 나의 파트와 C의 파트가 합쳐진 러프한 합본이 답장으로 왔다.

오오, 내가 작업한 프레임들이 70프로는 남아 있었다.

물론 70프로와 100프로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그의 작업이 없었다면 그냥 아재 슬라이드 느낌이 훨씬 강했으리라.


그래도 어쨌든 배운 스킬을 써먹어 봤다는 사실에 나는 감격했고,

C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가능한 많은 일들을 그 아이와 같이 하고 싶었다



이별의 순간

그런데, 내가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C는 이번 여름에 미국으로 MBA 유학을 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래들끼리는 다 알고 있는 일이었는데,

역시나 복직왕답게, 거의 마지막에 알게 되었다.


많이 아쉬웠고 서운했다.

받은 건 많은데 별로 해 줄 게 없어서 미안하기도 했다.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서 

지난 내 경험을 인용해 얘기해 주고도 싶었지만, 

이것도 일종의 라떼 이야기 같아서 최소한으로만 말하고 말았다.

내가 경험한 지난날의 업계와 

이 아이가 앞으로 맞이할 미래의 업계는 분명 다를 테니.


그냥 연락의 끈을 놓치지만 말자고 했다.

말 그대로 keep in touch.

가끔 네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알려줘.

그리고 만약 노련한 선배의 조언이 필요한 순간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고.


손가락이라도 걸고 약속하고 싶었지만,

주책이라고 할까 봐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한참 고민해서 찾아, 짧은 편지로 보냈다.


Change will make you cry,
But, life will make you grow


혹시 다시 못 보더라도, 정말 고마웠어.

나보다 20살 어린, 

우아한 파워포인트 선생님!


다시 만나자고,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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