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도 나름 전문직이었어
공식 퇴사 일주일 후 걸려온 두 통의 전화
26년간 일했던 회사의 마지막 출근 후, 한 달 반 남은 휴가를 알차게 사용하고 나니 어느새 공식 퇴사 날짜.
그 전날 인사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는지, 두루두루 상황을 묻는다.
그간 고생했다고 치사도 잊지 않는다.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혼자 싱숭생숭한 것보다는 그래도 누군가 알아주고 챙겨주니 좋았다.
이제 진짜 안녕. 고마운 회사
긴 시간 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애들 키워줘서 감사합니다!
일 많다고 투덜거린 때도 있었지만, 덕분에 많이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비록 헤어졌지만 서로 더 잘 됩시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다시 직장생활을 할 거라고는 별로 생각을 못했는데,
바로 그 며칠 후에 갑작스러운 취업 제안을 받았다.
글로벌 광고회사에서 컨택 왔을 때, 약간 감동
첫 번째는 지금까지 내가 주로 일해왔던 대형 광고주의 일을 우리 회사와 나눠 맡고 있는
글로벌 광고 대행사의 플래닝 헤드 자리였다.
일로 보면, 기존 업무와 거의 비슷한 일을 수행하는 자리였다.
종합광고대행사이고, 익숙한 클라이언트를 담당할 것이고, 이름까지도 플래닝 업무니까.
꽤나 많은 내 나이도 고려했지만, 현업을 끝까지 했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괜찮을 것 같다는 고마운(?) 말씀이었다.
일은 비슷하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기업 문화를 느끼면서 자신 있는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업계에서 내 평판이 나쁘지 않았나 보다 하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컸다.
재능기부로 진행한 학교 프로젝트의 인연 _ 모빌리티, 벤처
그런데, 그 다음날 또 다른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박사과정 지도 교수님이었다.
그 교수님 제안으로, 쉬는 기간 동안 단과대학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는데,
다행히 결과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여기저기 이야기를 하고 다녔더니,
브랜딩이 필요한 모빌리티 벤처기업에서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
그냥 프로젝트 진행인가 보다 하고 가볍게 만났다.
그런데, 마케팅 담당 CMO로 풀타임 직업을 구할 생각 없냐고 한다.
대표님들에 대해 물어보니, 벤처치고는 꽤나 높은 나이대고, 문과 출신이었다.
일반적으로 벤처라 하면 30대 공대 출신들이 많던데, 그건 사실 부담스러운데.
그게 아니라니 좋네요.
얼떨결에 찾아온 기회였지만, 벤처에서 한번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 식품, 패션, 화장품 같은 FMCG 쪽에 소질이 별로 없고,
IT나 자동차 분야를 주로 맡아왔던 내 커리어와 잘 맞는 제안이었다.
둘 중에 어디로?
두 쪽 다 채용을 서두르고 있었고,
대표이사님들 만나는 날짜가 비슷하게 잡힐 것 같아서 나름 선택을 해야 했다.
어린 나이도 아니고, 대표이사까지 만난 후
내 쪽에서 못 가겠다고 하면
나이 값도 못하고 창피할 것 같았다
인터뷰 날짜를 잡는 반나절의 시간 동안 급속 결정을 해 버렸다.
그래, 벤처다.
나도 이제 새로운 일을 좀 해보자
어차피 직장 생활 끝내기로 했던 거, 지금부터는 부록인 셈인데,
실패하더라도 인생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 봤다는 기억이라도 남겨보자.
벤처 대표님 면접
두둥, 드디어 대표님 면접날.
이 나이, 이 연차가 되어 면접을 보니, 이십여 년 전 면접 상황 하고는 사실 좀 다르다.
옛날에는 저쪽에서 기대하는 바에 맞춰주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그분들이 생각 못했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만의 경험과 관점과 식견을 보여줘야 한다.
누가 해도 대충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마케팅이라는 영역에서
도대체 내가 왜 이 자리에 적격인 것인지?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별로 진진하게 생각지 않았던
마케팅이 무엇인가, 브랜딩이 무엇인가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들을
꽤나 심도 있게 나눴던 것 같다.
“브랜드는 리더들의 꿈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런 멋진 이야기도 했다!!
(아니, 내가 이런 말을??)
그리고 그다음 주부터 출근
벤처답게 빠른 의사결정이었다.
테헤란로 공유 오피스로 출근!!
사진 파일 제출하니 그다음 날 바로 카드키가 나왔다.
목에 두르니 다시 직장인인 되었다는 실감이 왔다.
마냥 좋지도, 그렇다고 싫지도 않다.
역시 체력은 힘들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완전 새로운 일을 한다는 재미는 있다.
월급이 주는 안도감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다녔던 직장에서 느꼈던 ‘상수’ 같은 느낌은 없다
언제든 상황은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변수’ 같다
회사 상황이 갑자기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예측 못한 엄청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내 위치가 갑자기 안 필요해질 수도 있으며,
같이 일하는 사람과 예상 못한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냥 한번 해 보자.
소신대로.
마케팅도 나름 전문직이었어
연말, 연초 몇 달 동안
퇴사, 휴식, 재취업의 극적인 과정을 겪으면서 새롭게 느낀 점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마케터라는 직업이 의외로 전문직이고, 수요가 많다는 것 -
우리 브랜드 일 좀 해 주실래요?
박사 과정에 진학하고 보니, 의외로 이런 제안들이 많았다.
예전처럼 소수의 브랜드가 주도하는 시장이 아니라,
다양한 취향에 맞춘 다양한 중소 브랜드들이 난립하는 개성 분출의 사회가 아닌가.
벤처들도 많이 생기고.
그러니, 우리 마케터도
현업에서 손을 놓지 않는 한,
촉이 무뎌지지 않는 한,
밥 먹고 사는 일을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싶다
그냥 기존에 하던 일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일을 무서워하지 말고
과감히 한 발 내디뎌 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우리도 전문직이야.
자격증은 따로 없어도
우리가 했던 일의 결과들이
우리를 증명해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