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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Jul 01. 2022

50대 마케터, 스타트업 적응기

이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나

택시 플랫폼 스타트업 CMO


그렇다, 나는 대한민국 택시 플랫폼 스타트업의 CMO 자리로 이직했다.

회사 내 최고령이다. 공동대표님들보다도 한 두 살 많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이런 나를 뽑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평생 대행사만 다니다가 클라이언트로 이동 -

시스템이 잘 돼 있는 대기업도 아니고 개인기가 중요한 스타트업 -

게다가 디지털 테크 얼리 어답터도 아니면서 플랫폼 회사라니 – 

스스로 생각해도 용기가 가상하다. 


3개월이라는 수습기간 동안, 온갖 회의 시간마다 메모장을 들고 다니며 빼곡히 받아 적고 

틈날 때마다 다시 봤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다가 2~3주 후에야 그 메모가 이해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3월 이직하고서 4월부터 택시 대란. 

저녁 귀가 전쟁이 벌어질 때면 택시가 모자라서 동티가 날 지경이니

당장 매출 걱정은 하지 않고 있다.


 웬 운명의 장난? 나는 사실 길치


지금 주력업종은 택시지만, 명색이 종합 모빌리티를 표방하는 회사다.

그런데, 사실 나는 길치에 운전치, 방향 감각이 없다. 

그런 내가 과연 지속 가능한 일을 시작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가끔 든다.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이런 항변이 늘 기다리고 있다. 

내가 운전을 못하더라도, 나는 뭔가를 타고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은 매우 좋아한다, 

예전에는 낯간지럽게도 카톡 아이디를 “On the road”라고 한 적도 있다.

뭔가 치기와 허세가 어린 느낌이지만, 사실 뭐 내 마음의 상태가 그러했으니, 뭐.

한 마디로, 나는 이동을 좋아한다. 그래서 여행도 좋아한다

그러니, 적성에 맞는 거 아닌가?


또 하나의 걸림돌, 숫자 그리고 퍼포먼스 


플랫폼 회사답게 매일 아침 어제의 실적과 여러 가지 지표들이 대시보드에 잔뜩 업데이트되고,

심지어 숫자 가득한 엑셀 파일 메일도 매일 아침 받는다.

여덟 시에 출근해 이 메일 저 메일 열어보며 숫자를 파악하다 보면,

아홉 시에 출근하는 본부장께서 갑자기 질문을 툭 던진다.

“어제는 평소보다 가입자가 **명 정도 늘었던데, 왜 그래요?”

가슴이 철렁.

아직 그런 인과관계 및 숫자 개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거니와,

일억과 십억의 자릿수가 종종 헷갈리는 나로서는 매우 당황스럽다.


그럴 때 옆에서 대신 잘도 대답해주는 마케팅팀장 덕분에
겨우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정말 든든하다. 오늘은 또 그 대답하는 지표들을 좀 외어야겠구나.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이 녀석이 마음 한번 잘못 먹고 나간다 하면 어떡하지?

그 아래에는 완전 주니어들 밖에 없어서, 대체가 어려운데.

내가 빨리 일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평생 하던 컨셉추얼 한 일과는 

완전 다른 퍼포먼스 마케팅이라는 거, 예민하게 숫자 외어야 하는 이 일.

과연 내가 익숙해질 수 있는 걸까.

다행히도 그쪽 분야가 전문인 이 마케팅팀장은 

자기가 자신 없는 브랜드 영역만 내가 해결해 준다면 땡큐라고 눈을 똥그랗게 뜬다.

그래, 당분간은 이렇게 윈윈 구도로 가고, 서로 간에 노하우를 빨리 익히는 걸로 합시다.

존재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렇지만 내가 잘하는 거 설레발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면서 

오히려 객관적으로 내 강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계기도 생긴다.

매일매일 숫자와 상황에 코를 박고 사는 현장 마케터와 비교하면 

강점이자 약점인 것이 늘 사안들을 액면 그대로 보지 않고, 

의미나 큰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훈련을 평생 해 온 점이다.

어차피 이제 와서 약점 보완은 어려우니, 강점 강화로 십분 장기 발휘할 수밖에 -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어떻게 어떻게 하루를 또 메꿔 나간다.

그래도, 가슴 철렁할 일들이 조금씩 줄어가는 건 위안이 된다.


 로드쇼 행사 기획, 그리고 발표


다행히 와서 2주 만에 어영부영 대표님들께 보고한 브랜드 전략에 대한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 내용을 투자자 대상 로드쇼에서 발표해 보라는 격려(?)를 하시며, 

슬며시 로드쇼 업무를 맡겨 주셨다.

 뭐, 이런 일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지. 대행사에서 귀동냥, 눈동냥한 것도 많은데.

홍보팀 직원들과 한 달 정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준비를 했다.

콘셉트 잡고, 키 비주얼 잡고, 타이틀 잡고, 행사장 준비하고.

다행히 직원들은 생각보다 훌륭했고, 

삼성전자 이벤트 일을 하면서 눈동냥으로 본 것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어차피 브랜드 전략 발표야 뭐 늘상 하던 일이니까.


무사히 치러냈다. 

회사 들어와서 초반에 그래도 나에게 맞는 일을 잘해 낼 기회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걸로 적어도 연말까지는 가겠구나, 안도감.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쌓이면 

나도 대행사 물을 벗고 스타트업 CMO로 자리를 잡아가려나?


가장 크게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현장 스타일의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까지 하지 않던 현장 스타일을 일을 하는 것이 아직은 재미있다는 점.

내가 이 나이에도 뭔가를 새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점.

이 정도면 대만족 아닌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좋아하는 라떼 커피를 부담 없이 사 먹으면서 

마음속으로 외친다.

감사합니다, 대표님들!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시고, 또 계속 새로 도전할 일감을 만들어 주셔서 - 

오늘도 좋은 하루!!


회사 IR 로드쇼에서 브랜드 전략 발표 한 꼭지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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