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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망쳤다고요? 축하합니다

여행과 스트레스 성장 이론

by 설부인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악몽 같은 사건


오 마이 갓, 눈 떠보니 8시였다.


20년 전 폴란드 바르샤바로 출장을 갔던 때였다. 마지막 날, 함께 일한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회식 자리를 가졌다. 다음 날부터는 휴가를 내고 이탈리아 로마로 넘어가 혼자 여행을 하기로 계획을 잡았었다. 너무 신나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마셨고, 호텔로 돌아온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취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이미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9시 비행기였는데.


세상에 태어나 외국에서 비행기를 놓쳐버리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없이 짐을 싸서 공항으로 달려갔다. 한 시간가량 이어진 택시 안은 한마디로 고문 같았다. 원래 걱정 많고 소심한 나는,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온갖 최악의 상황과 자책감에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반전.


공항에 도착해 해당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니, 다음 비행기가 2시간 뒤에 있으니 그걸 타면 된다고 했다. 뭐?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인생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이 끝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을 가다듬고 공항에서 뜨거운 수프를 사 먹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수 한 번 한다고 죽지 않아. 나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그리고 이젠 회복력 짱짱한 20대도 아니니, 외국에선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로마 여행을 끝내고 보니, 멋진 박물관이나 맛있는 음식보다도 비행기를 놓친 기억과 스스로에게 건넨 위로와 결심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었다.




여행 스트레스를 통한 성장의 기회


우리는 흔히 여행을 '휴식'이나 '즐거움'의 대명사로 여깁니다. 하지만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속담처럼, 여행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동반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꺼이 고생을 감수하며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요?

여기, 심리학 이론인 '스트레스 관련 성장(Stress-Related Growth, SRG) 이론'이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이론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긍정적인 심리적 성장과 변화를 촉진하는 '도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제가 겪었던 그 끔찍한 경험이 심리학적으로 이렇게 설명된다니 재미있지 않으신가요?


스크린 속 '고생'하며 성장하는 여행자들


SRG 이론이 말하는 '고생을 통한 성장'은 많은 영화와 예능 콘텐츠에서 매력적인 서사로 그려집니다. 주인공들이 역경을 딛고 내면의 강인함을 발견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공감을 선사하죠. 이러한 성장은 주로 세 가지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1. 자기 인식의 변화


여행지에서의 역경을 통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유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치 영화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처럼요.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채 4,285km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홀로 걸으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내면의 강인함을 발견합니다.

또 다른 영화 <127시간>의 주인공 아론 랄스톤은 극한의 물리적, 정신적 스트레스 속에서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고 삶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2. 관계의 변화


낯선 타지에서 함께 간 사람들과 실수하고 서로 감싸며 더 깊은 공감 능력을 갖게 되거나, 현지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소중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예능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시리즈가 이 사례를 잘 보여줍니다. 무계획으로 떠난 기안84와 동료들은 다양한 고생을 겪지만, 서로에 대한 우정과 현지인들과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3. 삶의 철학 변화


여행자들은 평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대안들을 보며 인생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영화와 예능 콘텐츠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죠. 영화는 주인공의 거대한 인생관 변화까지 보여주지만, 예능에서는 돈과 물질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 소중하다는 평범한 깨달음을 꽤나 공감가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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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시리즈: 배우 이시언, 기안84, 덱스 등이 무계획으로 떠나는 날 것 그대로의 여행을 담는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과 불편함 속에서 출연자들이 온몸으로 고생하고 적응하며 성장하는 과정이 핵심이다. 현지인과의 소통의 어려움, 위생 문제 등 다양한 스트레스 요인에 직면하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경험과 깊은 깨달음을 얻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큰 공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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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와일드>: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가 4,285km에 달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홀로 걷는 실화 기반 영화다.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배고픔, 추위, 고립감, 부상)을 겪으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내면의 강인함을 발견하는 전형적인 SRG 사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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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27 시간>: 암벽 등반 중 바위에 팔이 끼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 주인공 아론 랄스톤(제임스 프랭코)의 처절한 생존기를 다룬다. 극한의 물리적, 정신적 스트레스 속에서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고, 인간의 생명력과 의지, 그리고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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