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경제의 4E
에피소드 1.
칠순 기념으로 터키에 여행을 가신 친정 부모님. 여행 잘 다녀오셨나 인사차 집에 갔는데, 가이드의 설명을 다 기록해 오고, 사진 CD도 소중하게 간직했다며, 우리에게 메모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즐겁게 잘 놀고 오시라고 보내 드렸는데 왜 이리 ‘열심히’ 여행하신 걸까?
에피소드 2.
스페인 플라멩코에 대한 문화센터 강연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강의를 듣는다. 요즈음 여행지로서 스페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여행에 앞서 스페인 문화, 언어, 역사에 대해 미리 알고 공부하려고 한다. 말 그대로 '공부하는 여행', 그래야 가서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칠순 기념으로 터키에 여행을 다녀오신 부모님은 가이드의 설명을 모두 기록했고, 스페인 플라멩코 문화 강연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듭니다. 즐겁게 놀다 오라 했는데, 왜 우리는 여행지에서 '공부'를 하려는 걸까요?
이 모든 것은 '경험' 그 자체가 핵심 상품이 되는 '체험경제(Experience Economy)' 시대의 흐름입니다. 1999년 경제학자 조셉 파인과 제임스 길모어가 제시한 이 개념은, 과거 농업, 산업, 서비스 경제를 잇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죠. 이제 기업들은 고객에게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을 선사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가치의 진화 단계를 살펴보면 명확합니다. 원자재(상품) → 제품(물건) → 서비스(행동)를 거쳐 궁극적으로 '체험(Experience)'의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행위도, 단순히 '카페에서 마시는 서비스'를 넘어 이제는 테마가 있는 카페에서 분위기를 즐기는 '경험'이 훨씬 높은 가치를 창출합니다.
파인과 길모어는 소비자가 경험에 참여하는 방식과 환경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체험을 네 가지 유형, 즉 '4E'로 분류합니다.
오락적 체험(Entertainment): 영화나 콘서트처럼 수동적으로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육적 체험(Education): 요리 수업이나 박물관 워크숍처럼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심미적 체험(Esthetic):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나 미술관처럼 환경에 동화되어 감각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죠.
일탈적 체험(Escapist): 방탈출 게임처럼 실제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체험경제, 마케팅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소비자들이 '체험'을 중시하게 된 배경에는 복합적인 사회·경제적 변화가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서 사람들은 '소유'보다 '경험'에서 더 큰 만족을 느끼게 되었죠. 여기에 소셜 미디어를 통한 '공유' 문화, 개인화와 자기표현 욕구 증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체험경제 트렌드는 관광 마케팅에 빠르게 수용되었습니다. 사실 관광은 본질적으로 '경험'을 파는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단순한 '장소 이동 서비스'를 넘어, 이제는 4E 이론에 기반한 다양한 여행 상품이 등장하며 관광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K-예능에서 빛나는 체험경제의 4E
한국 예능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체험경제의 트렌드를 기가 막히게 포착하여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습니다.
<스페인 하숙> (tvN):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한식을 제공하며 오락적 체험(Entertainment)을, 출연진과의 교류를 통해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적 체험(Escapist)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윤스테이> (tvN): 고즈넉한 한옥에서 외국인 손님들에게 숙박과 한식을 제공하는 이 프로그램은, 아름다운 한옥의 심미적 체험(Esthetic)을 극대화한다. 외국인들은 한국 전통 가옥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출연진이 직접 만든 정성 가득한 한식을 맛보며 오락적 체험(Entertainment) 요소를 즐긴다. 또한, 한국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교육적 체험(Education)이자, 일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일탈적 체험(Escapist)을 선사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기안장 대환장> (웹 예능): 웹툰 작가 기안 84의 집인 '기안장'에 게스트를 초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 프로그램은 호스트의 독특한 개성을 중심으로 한 매우 개인적인 체험을 제공한다. 게스트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기안 84 특유의 라이프스타일 속으로 들어가 일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일탈적 체험(Escapist)을 만끽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독특한 구조물에 미학적 체험(Esthetic)도 만끽한다. 이는 일반적인 숙박업에서는 얻기 힘든, '개성 있는 호스트와 함께하는 특별한 경험'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니즈를 잘 반영한다.
자, 그렇다면 당신의 여행은 어떤 'E'에 가장 가까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