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체험과 맥도날드화 이론
지난 추석 연휴 시작하는 날, 벼르고 벼르던 한옥 스테이에 나섰다.
꽤 오랜 시간 경기도 남쪽 아파트 생활만 한지라 북촌 한옥집에 대한 로망도 있고,
고궁을 밤에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TV 속에서 연예인이 북촌 한옥집에 1주일씩 살아보기 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마음도 들었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하려고 숙박 플랫폼을 다 뒤졌는데,
호젓하고 분위기 있어 보이는 한옥 스테이는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1박에 50만 원을 훌쩍 넘는 곳도 있었다.
누구나 알만한 강북의 유명 호텔들은 그에 비하면 오히려 싼 편.
그래, 이게 체험의 값인가.
그러다가 평점이 좋은 한 한옥 스테이를 찾게 되었다.
1박에 20만 원선이었다. 화장실도 따로 있고, 다락도 있다고 했다.
옛날식 마당에 평상이 무심히 놓여 있는 것도 멋져 보였다.
무엇보다 평점이 높아서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당일.
미리 예약한 종묘 투어부터 4시에 시작했다.
종묘를 한 시간 둘러본 후 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 구경도 하고,
종로의 소문난 맛집에서 저녁도 맛있게 먹었다.
8시 넘어 어둑해진 길을 걸어 스테이로.
가는 길에 광화문 앞에서 야경 사진을 찍으니 느낌이 아주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여유로운 기분을 못 가졌겠지만 숙소가 가까이 있으니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집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 그럴싸한 한옥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로망들은 하나둘 흔들리기 시작했다.
삐걱거리고 이가 잘 맞지 않는 대문,
2~3평 남짓한 좁은 마당,
한 귀퉁이의 내 방으로 들어서자 느껴지는 야릇한 곰팡이 냄새. 좁은 방.
덩그렇게 놓인 깔고 눕는 이불 2채.
오래된 방들을 따로따로 개조해서 숙박을 내 준지라,
우리 외에도 4~5개 팀이 숙박을 한 것 같았다. 외국인들도 있었다.
마당에 나가 평상에 앉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화장실이 좁게나마 붙어 있고 샤워도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하긴. 지은 지 몇십 년 된 구옥인데, 크게 수리하기도 어려우니
형태를 유지한 채 조금조금씩 수리 정도밖에 할 수 없었겠지.
흠. 이것이 도심 속 한옥의 현실이지.
기대했던 한옥의 고즈넉함이나 여유로움을 경험하려면 한옥 독채를 얻어야 하는 것이었나 보다.
겨우 좁은 방 한 칸을 얻으면서 기대가 너무 컸던 거지.
이미 서울의 땅값, 집값은 엄청나게 올랐고,
이 집을 소유하는 값을 하려면 주말이나 휴일에 최대한 손님을 많이 받도록 해야겠지.
이런 현실이 확 느껴졌다.
헴헴. 그래.
오래된 한옥 한 귀퉁이에서 잠을 청하면서,
‘그래도 종로에서 저녁 식사 맘 편하게 했잖아..
시골 할아버지 집 간 이래로 처음으로 한옥에 머물러 봤잖아..’ 마음의 위로를 했다.
좁은 마당에 4~5개 팀이 동시에 묵는 구조. 삐걱거리는 문과 곰팡이 냄새.
내가 기대했던 한옥의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고,
'최대한 많은 손님을 받아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방식만 남아 있었다.
이게 바로 '맥도날드화'이론을 만든 조지 리처(George Ritzer) 교수가 말한 '효율성'의 원리다.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결과를 얻으려는 이 원리는 맥도날드 성공의 비결이자,
현대 사회 곳곳에 스며든 맥도날드화의 첫 번째 특징이다.
'1박 20만 원선', '평점 4.8'.
나는 한옥을 예약할 때 이 숫자들에 의존했다.
한옥이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 주인의 철학, 동네의 이야기 같은 것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비용과 평점이라는 측정 가능한 숫자가 모든 것을 대변했다.
리처 교수는 이를 '계산 가능성'이라 불렀다.
질보다 양, 경험보다 숫자가 우선되는 세상.
맥도날드의 '빅맥'처럼 크기와 가격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이 여행에도 침투한 것이다.
숙박 플랫폼의 깔끔한 사진들, 높은 평점, 그리고 '화장실 딸린 한옥'이라는 정보는
나에게 '예측 가능한' 경험을 약속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마치 어느 지점에 가도 똑같은 맛을 내는 맥도날드처럼,
한옥 스테이도 '누구나 만족할 만한' 표준화된 경험을 제공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건 예측과는 다른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간극이 실망으로 다가왔다.
예약 시스템, 체크인 안내 문자, 평점 관리. 한옥의 주인과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않고도 모든 게 진행되었다. 이것이 '통제'의 원리다. 인간의 불확실한 요소를 시스템으로 대체해 예측 가능한 결과를 만드는 것.
고객 경험을 최대한 통제하여 리스크를 줄이고 정해진 수익을 얻는 방식.
한옥이라는 전통 공간조차 디지털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결국 서울이라는 엄청난 땅값 위에서,
한옥은 더 이상 '고즈넉함을 누리는 공간'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숙박 상품'이 되어버렸다. 내가 경험한 것은 한옥이 아니라, 한옥의 모양을 한 맥도날드화된 숙박 서비스였던 셈이다.
관광학에서는 이를 '진정성(authenticity) 추구'라고 부른다.
일상에서 벗어나 '진짜' 경험, '의미 있는' 순간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진정성마저 맥도날드화된 시스템 안에서 상품화되고 있다.
하지만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날 밤 한옥에서의 실망 속에서도,
종묘를 천천히 걷던 오후의 고요함,
광화문 앞에서 여유롭게 찍던 야경 사진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 순간들은 평점도, 가격도, 예측 가능성도 없었다. 그저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었다.
진정한 여행의 가치는 어쩌면 완벽하게 계획된 숙소나 '인생샷'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골목길, 우연히 마주친 사람, 계획에 없던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맥도날드화된 관광 상품들 사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평점 대신 호기심을, 효율성 대신 여유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한옥스테이 #맥도날드화 #여행의진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