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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리뷰가 망친 여행, 노마디즘에서 길을 찾다

by 설부인

패키지여행은 싫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여행하겠다고 호기롭게 나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의 상업적 리뷰에 혹해

사진이 잘 나온다는 핫 스팟, 모두의 평가가 좋다는 식당 도장 찍기 여행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봄, 독서모임 멤버인 4050 여성들과 함께 보은과 옥천을 여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젊은 멤버가 치밀하게 짜온 계획대로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부소담악, 수생식물원 외에도 서너 곳의 스폿들과 그 노정 틈틈이 식당들까지

온갖 리뷰를 참고하여 정말 공들여 짜인 일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선정한 사람의 노고를 생각하여 누구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음식 맛은 평균적이었고,

장소들 또한 한두 시간씩 차를 몰고 찾아갈 만한 곳이 아닌 경우도 여럿 있었다.


말 그대로 상업적 여행 리뷰 시대의 폐해였다.

그때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미리 모든 자료를 찾아서 너무 상세하게 계획을 짜기보다는

그냥 현지 시장을 들러 거기에서 만난 현지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는 방식은 어땠을까.

휴게소에서 지도를 보고, 여행 표지판을 보고 우연히 찾아가는 방식은 어땠을까.


우리는 이제 사회인 내지는 생활인 경력이 2~30년 이상 된 사람들이라 판단력도 있고,

자기 취향도 뚜렷한 사람들인데,

실패 없는 여행, 가성비/가심비 좋은 여행이라는 타이틀에 얽매여 남의 말을 너무 참고하는 것일까.


그때 깨달은 내 인생 후반기 여행의 모토는 "계획보다는 즉흥적인 여행을 하자"이다.

여행에서 인생 망할 정도의 실패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길에서 내가 느끼는 감성에 충실하게 남의 평가와는 조금 다른 길로 가면 어때.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지지해 주는 철학적 관점이 바로 노마디즘이다.

이는 단순히 '어디'를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여행하고 '어떤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노마디즘, 굳어진 생각에 던진 질문


노마디즘은 정답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정주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서양 철학의 오랜 전통인 이분법적 사고(정신/육체, 이성/감성)와 위계적 구조가

현실의 복잡성과 유동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보았다.

대신 그들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연결되는 '흐름' 그 자체에 주목했다.


이러한 노마디즘 철학은 우리가 여행하는 방식에 깊은 깨달음을 준다.

'정해진 길'을 벗어날 용기: 노마디즘은 미리 정해진 관광 코스나 대중매체가 제시하는 규격화된 경험을 '홈이 패인 공간(Striated Space)'이라고 부른다. 이는 도시의 도로망처럼 질서 정연하고 편리하지만, 우리의 주체적인 경험과 우연한 만남을 가로막을 수 있다. 패키지여행이나 맹목적인 리뷰 도장 깨기 여행이 여기에 속한다.


'경계 없는 공간'의 탐색: 노마드적 여행은 이 홈이 패인 길을 벗어나 '매끈한 공간(Smooth Space)'을 탐색하는 것이다. 사막이나 바다처럼 정해진 목적지나 길이 없는 곳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유목하며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물리적으로 덜 알려진 길을 걷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각과 직관을 따라 순간순간의 경험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나'의 재발견: 여행은 정해진 역할과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나'를 만나는 시도이다. 낯선 곳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며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은 곧 새로운 나를 '생성(Becoming)'하는 경험이 된다.




노마드적 여행: 나만의 길을 유목하는 행위


결국 노마디즘은 우리에게 '패키지'나 '리뷰'가 제공하는 안전한 길을 무조건 따르기보다,

스스로가 '유목하는 주체'가 되어 삶의 흐름을 통제하고 변형시키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가는 길'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유목하는 행위이다.

남들이 갔던 길이라도 내가 어떤 태도로 걷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나에게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여행의 본질을 '소유'나 '소비'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게 한다.


이제 타인의 리뷰가 아닌 나 자신의 마음의 지도를 따라,

진정한 나만의 길을 유목해 보시는 건 어떨까?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바로 새로운 자신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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