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향수 이론
큰아이가 8살, 작은아이가 5살일 때 온 가족 이탈리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사실 5살짜리 작은 아이 땜에 꽤나 망설였던 것 같다. 가면 고생도 많이 할테고, 나중에 기억도 못할 텐데 굳이 이 돈을 써가며 여행을 가야 하나? 하고.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큰 마음먹고 여행을 결심했고, 결과적으로는 '결심하기를 잘 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추억'이라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가치 때문이다. 이 추억은 과거의 빛으로 현재를 채워주는 여행의 기억이 된다.
일주일간의 여행 동안, 8살짜리는 그래도 한 사람 몫을 해냈지만, 5살짜리 아이는 결국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공항에서 캐리어를 끌면 그 위에 올라타고, 좀 길게 걸어야 한다고 하면 바닥에 누워 업어달라고 칭얼거리고, 급기야는 힘들었는지 업혀가는 등 뒤에서 오줌을 싸기도 하는 등 여행하는 내내 아빠를 너무나 고생시켰다. 물론 캐리어를 타고, 피자나 컵라면 같은 제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흘러나오는 거리 음악에 춤을 따라 출 때는 엄청 즐거워하긴 했지만. 즐겁고도 힘든 여행을 마무리하고 어느새 그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이제 그 아이가 25살인데, 이탈리아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면 디테일한 장소(바티칸 박물관, 콜로세움 등)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한다. 하지만, 숙소에서 먹었던 컵라면과 아빠 등에 오줌을 쌌던 기억은 용케도 해낸다. 아빠에 대한 반항기가 다분한 아이지만, 아빠가 그 얘기를 하면 꼼짝을 못 하고 그 노고를 인정한다. 그리고, 함께 했던 가족 모두가 한바탕 웃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때 꽤 큰돈을 썼지만,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어릴 때 해외여행 가봤자 기억도 못 하는데 고생만 한다."는 말이 있다. 8살 이하 어린 자녀는 여행의 구체적인 지명이나 사건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명시적인 기억은 사라져도, 정서적 경험과 '기분'은 아이의 내면에 오래 남는다. 부모와 함께 낯선 것을 보고, 맛보고, 느끼는 과정에서 아이는 안정감과 즐거움을 느낀다. 정확히 어떤 장소였는지 기억 못 해도, '그때 부모님과 함께 즐거웠다'는 긍정적인 정서는 아이의 정서 발달과 부모-자녀 간의 유대감 강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아이가 직접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여행에서 남긴 사진과 영상은 가족 공동의 소중한 '추억거리'가 된다. 여행 사진첩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은 가족 간의 공동된 서사를 만들고 유대감을 강화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아이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보고,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다진다.
신혼여행은 단순히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것을 넘어, 부부 관계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마냥 행복하기만 한 여행은 없다. 허니문이 마냥 꿈처럼 행복하기만 했다는 사람을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멀면 먼 대로 예상치 못한 어려움 내지는 갈등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여행 중 길을 헤매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예: 별러서 박물관에 갔더니 휴관일이었다 등)이 발생했을 때, 두 사람은 함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다른 성향과 스트레스 대처 방식이 드러나기도 한다. 물론 싸우기도 엄청 싸운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함께 견뎌내고 끝내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이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든다. 힘들었던 순간조차 나중에는 "그때 우리가 길을 잃어서 얼마나 헤맸는지 기억나? 그래도 결국 찾았잖아!" 같은 긍정적인 '향수'의 대상이 된다. 힘들었던 순간을 함께 이겨낸 서사는 두 사람만의 특별한 '스토리'가 되어 관계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신혼여행 중의 사진은 이후 몇십 년을 같이 살아가는 시간 동안에 묘한 존재로 자리 잡는다. 주로 현실이 힘들 때, 마음에 위로가 필요할 때 우리는 신혼여행 사진을 꺼내보지 않는가? 같이 보면 더 좋다. 뷰 좋은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의 따끈따끈한 훈기, 이국적인 뒷골목에서 함께 폼 잡고 활짝 웃는 사진을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은 훈장이 되어 둘만이 간직한 보석 같은 추억으로 재생되지 않는가. 그러니, 신혼여행에 큰돈을 들여 타국으로 멀리멀리 가는 것은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다. 멀리 갈수록 우리나라와는 다른 지역, 다른 문화를 맛볼 테니 그 과정에서 적응을 위한 보이지 않는 고생 또한 많을 것이고, 고생이 심할수록 그 추억 또한 깊은 임팩트로 남을 터이니 말이다.
그래, 우리는 살면서 문득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때가 있다. 잊고 지냈던 여행지의 풍경, 친구들과의 웃음소리, 특별했던 음식의 맛까지. 이러한 감정을 우리는 '향수(Nostalgia)'라고 부른다. 그런데, 현대의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은 향수를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넘어, 우리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중요한 심리적 자원으로 해석한다.
긍정 심리학은 인간의 강점과 미덕, 그리고 행복의 근원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이 관점에서 향수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다. 심리학자 콘스탄틴 세디키데스(Constantine Sedikides)와 그의 동료들은 향수가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심리적 기능을 한다고 설명한다.
자아 통합과 연속성 강화: 향수는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서사를 확고히 다지도록 돕는다. 마치 삶이라는 긴 영화의 중요한 장면들을 다시 보며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지'하고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유대감 증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소속감을 강화한다. 가족사진을 보며 느끼는 따뜻함이 바로 그것이다.
긍정적 정서 유발 및 부정적 정서 완화: 슬픔이나 그리움이 동반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과거의 긍정적인 경험에서 오는 기쁨과 만족감을 불러일으키고 현재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삶의 의미 및 목적 강화: 과거의 좋았던 순간들을 돌아보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동기 부여와 목표 설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러한 향수 이론은 여행 경험에도 매우 잘 적용된다. 여행은 단순한 여가를 넘어 우리에게 심리적 웰빙을 증진시키는 강력한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느끼는 '여행 앓이'는 그리움의 감정이다. 이때 여행 사진을 보거나 기념품을 만지는 행위는 향수를 유발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넘어, 당시의 행복했던 감정을 현재로 소환하여 일상의 활력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다. 여행의 긍정적인 경험을 일상 속에서 유지하며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여행지에서 가져온 기념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특정한 시간, 장소,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과 함께했던 사람들을 소환하는 강력한 향수 유발 매개체가 된다. 기념품을 볼 때마다 과거의 긍정적인 감정이 다시금 떠올라 현재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향수는 우리의 과거를 현재와 미래의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심리적 마법과도 같다. 그리고 여행은 그 마법을 경험하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에 가장 좋은 무대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니 비록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여행의 가치를 의심하지 말자. 당신의 모든 발걸음은 언젠가 빛나는 '향수'가 되어 돌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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