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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Jun 16. 2019

격식과 전통 사이,
누구를 위한 '교양'인가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6화


 그렇게 긴 여름이 가고. 나의 부모님은 없던 시부모님 친구분들이 '주 하객'이었던 결혼식이 끝났다. 남편 일 따라 우리는 제3국에서 신혼을 시작하였고 여느 부부처럼 곧 예쁜 아기가 생겼다.

 '축복' 속에만 있어도 모자랄 '출산'. 그러나 기울어진 틈 사이로 물밀듯 밀려온 가족들의 어지러운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출산은 한국에서 하였다. 출산에 맞춰 남편 일이 끝났었기에 한국에서의 출산과 휴식은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그렇게 내 몸 내 마음 편하려고 택했던 고향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그렇게 얼굴도 맘껏 보지 못했다. 모든 걸 함께 겪으면서도 일일이 내게 알릴 수도 없던 동생들에게 미안했다. 딸 출산했다고 사골국 하나 사줄 수 없는 아빠 심정을 지켜보는 것도 죄스러웠다.

 
 무엇보다 출산 전 날 가족들이 '신종 인플루엔자' 판정을 받아 출산 당일은 물론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얼굴을 비추지조차 못했다. 열흘 정도가 지나 처음으로 엄마 얼굴을 보았다. 엄마는 어릴 때 싸주시던 '도시락 반찬' 그대로 푸짐한 도시락을 들고 오셨다. 내가 좋아하던 매운참치볶음도 있었다. 엄마가 싸온 밥을 먹으니 그제야 얹혀있던 마음이 진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자꾸만 목이 매어와 밥이 잘 들어가지는 않았다. 
 
 몸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수술로 출산을 했다지만 심할 만큼 젖양이 모자랐다.
 외국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온 남편이 제안을 하였다. 출산한 지 '두 달이나' 지났으니 프랑스에 가서 시댁에 아기도 보여주고 한 달 정도 지내다오자는 거였다. 그래. 가자. 내가 조금이라도 자리를 비켜주는 게 '가족들에게 신세 지지 않는 게' 지금 내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몸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2개월 된 아기를 안고 우리는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댁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들 떠들썩하였고 시어머님은 온갖 파티를 계획해 놓으신 상태였다. 여전히 이 곳은 내게, 한국의 가족들과는 너무 다른 공기를 풍기는 '낯선' 곳이었다.
 
 어머님은 아기를 위한 예쁜 옷가지들을 사놓으셨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옷들을 입혀주기를 바라셨다.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아기 옷은 편한 실내복들이었는데 반해, 어머님이 사다 놓으신 옷들은 하나같이 '유럽 고전동화'에나 나올법한 고급 외출복들이었다. 거기에는 함께 착용하면 좋은 고급 타이즈들이 있었다. 타이즈만은 신기고 싶지 않았다. 아기가 답답해할 게 분명했기에. 하지만 내가 아기 옷을 입히고 있을 때면 어머님은 들어와 타이즈를 함께 신기고 나가셨다. 

 
 우리가 도착한 지 며칠 안돼 시댁에서는 '성대한 환영 만찬'이 있었다. 모든 가족과 친척들 이웃들 부모님 친구분들을 초대하여 '처음 아기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어머님은 화려한 차림으로 세심한 하나까지 챙기며 파티를 준비하셨다. 
 
 커다란 식탁 위엔 고급스러운 식탁보가 깔렸고 먹기에도 아까운 예쁜 케이크들과 쿠키들이 꽃장식 사이로 '품격 있게' 차려졌다. 양 옆으로는 역시 꽃으로 장식된 기품 있는 촛대와 은은한 촛불이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식탁 끄트머리에는 아기 선물들이 화려하게 포장된 채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우아한 그들'에게 '매끄럽게' 모든 것이 흘러가는 것은 중요했다


 초대된 손님들이 모두 자리를 하였고 이제 주인공인 아기가 등장하기만 하면 되었다. 어머님이 사주신 옷을 입히고 잘 안 들어가는 타이즈를 겨우 신겨놨는데 갑자기 아기가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곧 오겠다'며 아기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품으로 파고드는 아기에게 수유를 하기 시작했다. 


 아기는 거의 빈 젖을 물고만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 품에서 떨어지면 자지러졌고 울기를 반복하였다. 마음이 초조했지만 나에게는 아이의 안정이 우선이었다. 우리가 나타나지 않자 시아버님께서 나를 직접 부르러 오셨다. 내가 여전히 아기 젖을 물린 채로 앉아있는 것을 본 아버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며' 돌아서 가셨다. 다시 남편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남편은 '대체 뭐 하고 있냐는 듯' 나를 재촉하였다. 수유를 중단하자 아기는 집이 떠나갈 듯이 울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눈치 없이 이제야 나타난' 나는 그 순간, 그야말로 '이 나라 예법도 모르는 무식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손님들을 초대해놓은 '귀한 자리'에서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그들에겐 '예의에 벗어난 무례함'이었기 때문에. 

 힘이 빠졌다. 타이즈 신기는 것도 잠 못 자는 것도 괜찮았지만, 출산한 지 2개월 된 산모와 2개월 된 신생아가 20시간을 이동해 비행기를 타고 왔을 때의 몸상태와 마음 상태가 어떨지 헤아려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겨우 '격식을 차리는 것'이라니. 가족들은 금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두가 '우아한 미소'로 손님들에게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나 역시 쾡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띄며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아기도 나처럼 쾡한 얼굴로 간절하게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에 온 이후 나는 8시간의 시차 때문에라도 빈 젖만 종일 물고 있는 아기 때문에라도 잠을 못 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기도 똑같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나와 아기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매끄럽게 흘러가야 한다는 강박' 교양이라 불리는 '그들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들의 '우아함' 앞에 두 손 두 발이 묶인 느낌이 들었다. 대체 누구를 위한 예의이고 교양일까.


 몹쓸 유교적 전통의 잔재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의 현재를 갈아먹는 이 불온한 것이 그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몹쓸 전통'은 동양에만 있지 않았다. 개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존엄성'을 해하는 교양이라면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럼에도 그것은 너무나 '고귀하여'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일까. 내 안에서는 그것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만이 계속 자라났다. 


 시댁 가족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다. 그 자리에 계신 다른 분들도 그랬다. 그리고 사실 그들이 딱히 무엇을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은 '그렇게 배운 것' 뿐이었다. 그것이 '지성인의 태도' 이자 '예의를 지키는 교양' 인 것이라고.
 얼른 그 자리가 끝나기만을 바랬다. 어서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만 싶었다. 그저 한국이 그리웠다.

 하지만 나의 고향에는 내 몸하나 뉘일 곳이 없었고. 내 마음을 뉘일 곳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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