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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Jun 18. 2019

'이방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7화


 고향도 다른 어디도 '갈 곳이 없던' 겨울을 지나 우리는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책임져야 할 '생명'이 생겼고, 그 생명을 기르기에 좀 더 '나은 환경'이 필요했으며, 남편이 마침 프랑스에 직장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한국에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마음으로 떠났기 때문에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우리만의' 집다운 집이 생겼고,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아기까지 함께였다. 한 여름에도 습기가 없던 이곳은 햇빛만 피하면 시원했으며 잿빛의 서울 하늘과 대비되는 맑고 파란 하늘은 쾌적한 공기를 가져주다주었다. 그렇게 이제는 평온한 일상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막연한 희망을 품었던 듯하다. 앞으로 닥칠 난관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이제 갓 태어난 생명.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존재인 아기와 함께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처음 만나는 이 경이로움 앞에 고단한 몸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철저한 '무지'였다. '체력의 한계'를 넘어선 고단함과 스트레스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었다. 
 
 출산 후 몸을 잘 돌봐야 할 시기 2개월된 아기를 데리고 시차도 반대인 나라를 '무식하게' 날아갔었고, 여기저기 무수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채 몇 달을 보냈었기에 수술로 출산한 노산의 몸이 제대로 회복 될 리 만무했건만. 분유 수유를 하던 아기는 밤마다 자다 말고 자주 토를 하였다. 
 
 겨우 재워놓고 눈 좀 붙이려 하면 토를 하곤 했기에 나는 오밤중에 일어나 토사물 범벅이 된 이불을 빨고 침구를 다시 정리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때는 그 상황들이 그냥 괴롭기만 하였다. 더구나 아이는 몸이 조금만 안 좋으면 늘 기침을 하였다. 밤에 아기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날 밤은 잠은 다 잔 것이었다. 그 소리가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었다.
 
 남편은 장기출장이 잦았다. 거의 두세 달에 한 번꼴로 짧게는 열흘 또는 2주나 3주씩 집을 비우곤 하였다. 가족도 없이 친구도 없이 그 흔한 '말동무' 하나 없이 아기와 단 둘이 '고립되어 있던' 날들. 더구나 나는 불어를 할 줄 몰랐다. 남들처럼 프랑스로 유학을 왔다가 만난 것도 아니고 프랑스 관련 일을 하다 만난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결혼 직전 프랑스 알파벳인 '아베쎄데'를 겨우 떼고 온 게 다였다.

 아기는 꼭 남편이 출장을 갔을 때에만 아팠다. 수두에 걸렸을 때도 응급실을 찾아야 했을 때도 남편은 옆에 없었다. 말을 하지 못했던 나는 남편의 회사 동료들에게 연락을 하여 병원에 함께 가곤 하였다. 여기서 나의 진짜 시련이 시작되었다. '말'을 하지 못했던 것 '말'을 배워야 했던 것. 이민자들을 위한 '사회 정착 프로그램' 일환으로 의무적으로 불어 수업을 몇 시간 이상 이수해야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외국인들이 프랑스에 와 자기들 나라 세금으로 지급되는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대신 프랑스가 크게 의무를 지우는 것은 바로 '언어'였다. '자기네 나라 말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과 '자기네 문화의 기본을 이해할 수 있는 소양' 

 그들에게 자기들 땅에서 자기들 말을 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고, 그렇기에 그것을 위한 수업료 일부를 정부에서 보조해주기까지 했다. 처음엔 참 반가웠다. 어차피 나는 불어를 공부해야 했고 얼마간 공짜로 가르쳐준다니 이런 기특한 제도가 다 있나 싶었다. 그렇게 '외국인 의무 교육'을 위한 불어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의 '룰'을 따라야 했다. 나는 이방인 이었기에


 내가 배정된 학원은 여러 형태의 불어교육기관 중에서도 '대졸 이상의 학력자들'이 배당되는 곳이었고 하루에 3시간 주 5일을 꽉 채워 수업을 하는 곳이었다. 알파벳은 그나마 떼고 왔기에 왜인지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들의 수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불어로만' 진행이 되었다. 매일 앉아있는 그 3시간이 얼마나 고문 같았는지. 더 큰 문제는 숙제였다.

 스파르타식 수업인 만큼 매일 숙제가 한가득이었는데, 수업이 끝난 직후 바로 아기를 찾아와 온종일 돌봐야했던 나는 아기가 잠든 밤 10시반 이후에나 숙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질문 자체가 불어로 되있었기 때문에 끝도 없이 사전을 찾아야만 했고 그렇게 겨우 숙제를 끝내고 나면 새벽 2시 3시를 넘기기는 일쑤였다. 남편이 출장이라도 가서 없는 날들엔 그야말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수업을 겨우 따라가는 '지진아'를 면치 못하였다. 잠도 못 자고 하는 것은 '내 사정'일 뿐이었고 수업시간 내내 '멘붕 상태'로 있던 나는 도저히 모든 학습을 제대로 소화할만한 시간도 체력도 따라주지 못했다. 앞에서 선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겠는데 심지어 사전도 찾지 못하게 하였다. 


 참 속상하였다. 언어 능력에는 그래도 자신 있던 나였는데. 수학에서 늘 망해서 그렇지 언어 영역만큼은 만점을 받던 나였는데. 학교에서 배운 영어만으로 웬만한 의사소통은 할 수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아무 상관없어진 '한정된 체력과 시간'이라는 벽 앞에서 나는 완전히 브레이크가 걸려버렸다.


 같은 반에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앳된 한국 친구들이 몇씩 꼭 있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와서 '공부만 하면 되는' 그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친구들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수업을 들을 때 나는 너구리가 된 채로 떠다니는 단어들 사이를 조난자처럼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낸 다음에야 남편에게 선언하였다. 나는 불어를 '그만 배우겠다'고.
자고 싶었다. 도대체 잠을 잘 수 없었기에.
그만 느끼고 싶었다. 이 모든 '생경한 좌절감' 들을.


 지진아를 면할 수 없는 아기 엄마라는 고단한 현실도. '이제 막 말을 뗀 어린아이를 쳐다보는 듯'한 눈길을 매 순간 감내해야 하는 것도 다 그만하고 싶었다. 이들의 음식이 내게 '소화불량'이었듯, 말을 즐겁게만 배울 수 없는 현실에서 수업을 이어간다는 건 그저 
'소화할 수 없는 이물질'을 계속 집어넣는 것과 같았다. 


 한국말이 필요했다. 한국말로 하는 수다가 필요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한국말'이면 되었다.


 그렇게라도 '나'를 건져 숨 쉬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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