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친동생이 프랑스에 길게 머물던 적이 있었다. 감각이 좋은 동생은 벤시몽의 나라에 온 것을 기뻐했고 엔틱 소품점에 가는 것을 행복해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멋진 옷을 곧잘 사 입던 동생은 정작 프랑스에 ‘살 옷이 없다’며 놀라워했다. 많은 기대를 안고 온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애들은 대체 옷을 어디서 사는 거야? 살 게 하나도 없는데?"
동생 말이 맞긴 하였다. 프랑스에 온 이후로 나는 옷을 거의 사 본 적이 없다. 더 이상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이기도 했지만 적당한 가격의 예쁜 옷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더구나 프랑스에는 한국처럼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예쁜 보세 옷 가게가 없었다. 대신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명품 가게들과 그 외의 브랜드 상점들이 간간이 있을 뿐이었다. 상의 하나에 10만원 20만원씩 하는 프랑스 브랜드 옷들은 예쁘더라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같은 돈이면 한국에서 싸고 예쁜 옷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에서 옷을 사는 것은 재미도 없었을뿐더러 구매욕을 자극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여기서는 대충 입고 살다가 한국에 가면 옷을 샀다. 부담 없는 가격의 다양한 브랜드들과 스펙트럼 넓은 시장 물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프랑스에 사는 많은 교민들이 한국에서 옷을 사 온다는 것을 말이다.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패션의 나라’에 살면서 쇼핑을 한국에서 하다니.
하지만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 옷들이 훨씬 품질도 좋고 더 예쁘고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시댁 가족들 집안 행사에 차려입고 나가는 옷도 늘 한국에서 사 온 옷들이었다. 그때마다 시누이들은 말한다. "옷 너무 예뻐. 어디서 샀어? 한국에서 샀지!" 내가 특별하고 예쁜 옷을 입으면 그 옷들은 모두 한국에서 사 온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 사는 한국 친구들과도 늘 하는 말이 있다. "쇼핑은 한국에서!" 그만큼 한국은 빈약한 프랑스에서의 쇼핑 욕구를 채워주는 완벽한 시장이었다.
이처럼 프랑스는 고급스런 명품 브랜드들이 있을 뿐 막상 서민들은 쇼핑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몇 개 되지 않는 일부 브랜드들도 고가이기에 서민들은 대부분 Z와 H로 시작하는 대형 체인형 옷가게에서 옷을 산다. 얼마나 옷 살 곳이 없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불과 몇 년 전 프랑스에 들어온 일본 브랜드 U 경우다. 유명 브랜드 U는 입점과 동시에 프랑스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가 되었다. 프랑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다양한 제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불매운동으로 망해가는 회사가 프랑스에서는 이제 막 뜨고 있는 모습을 보는 아이러니. 그만큼 다양한 제품에 대한 프랑스 소비자들의 갈증은 매우 크다. 그럼에도
실제 프랑스 거리에서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들은 ‘파리지앵룩’이거나 ‘프렌치 스타일’이 아닌 ‘아무 스타일도 아닌’ 단조로운 옷들이 많다.
지극히 평범한 ‘아웃도어 패션’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많고, 청바지에 검은색 우비 재킷 하나면 끝인 게 서민들의 가장 흔한 차림이기도 하니 말이다. 색상 또한 생동감이 느껴지는 컬러기보다 우중충한 검은색이나 회색을 많이 입고, 패션은커녕 아무 멋도 없는 옷을 ‘걸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이 입는 외투들은 직물 퀄리티가 떨어지거나 한국에서 한참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촌스런 스타일의 옷들도 꽤 많다. 그들이 입는 옷들 대부분은 개발도상국에서 수입된 저렴한 공장형 브랜드의 옷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렌치 패션’이란 특정 계층의 멋스런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일 뿐, 결코 프랑스인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프렌치 스타일의 출발은 사실 ‘명품 브랜드’에서 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급스러움은 있으나 참신함은 없다. 클래식의 특징인 ‘고상함’이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명품 브랜드들은 변화가 거의 없는 일정한 톤을 유지한다. 그것이 이들이 말하는 ‘클래식’이고 ‘전통’이다. 요란 떨지 않고 우아할 것. 본래의 방식을 유지할 것. 최고의 퀄리티를 고집할 것. 프랑스 어떤 유명 브랜드도 서민을 위한 것은 없다. 이렇듯
‘패션의 나라’라는 타이틀은, 상류층의 자기만족과 자기과시에 해당되는 것일 뿐 서민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이다.
프랑스 서민들 누구도 명품을 입지 않으며, 어디나 그렇듯 프랑스 서민들도 먹고살기 바쁠 뿐 패션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식의 나라’라는 타이틀이 프랑스인들의 보편적 식문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 서민들이 초라하고 단출한 음식을 먹듯, 패션 역시 부르주아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 평범한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무엇이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것들은 철저히 ‘대상화된 문구’ 일뿐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빈티지룩이나 에스닉룩 같은 히피룩 같은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옷을 입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주장이 강한 진취적 여성들이나 규격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인 경우다. 그러나 ‘일부 프랑스인들’ 일뿐이다. 오히려 프랑스인들은 꾸미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다. 대표적인 예로 이들의 ‘노메이크업’이 있다. 화장을 안 한다는 것은 그만큼 치장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연히 옷을 차려입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샤넬 화장품’은 프랑스 여성들이 구매하는 것이 아닌 ‘상류층 여성들’이 소비자일 뿐이다.
이처럼 자신들의 방식을 ‘전통’이라 명명하여 일관되게 지키고자 하는 상류층과 아무런 전통 없는 ‘단조로움’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서민들. 서로 다른 두 계층의 공통점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의 ‘검소함’이란 사실, 변화에 둔감하고 색다름에 관심 없는 성정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 사람들의 ‘네추럴함’이란 사실 이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렌치’라는 브랜드의 위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말이 붙은 고유 명사는 생각보다 꽤 많기 때문이다. 프렌치 토스트, 프렌치 키스, 프렌치 룩, 프렌치 캣, 프렌치 카페... 그것들이 ‘고유한 프랑스만의 것’이 될 수 없음에도 그렇다고 믿게 만든 힘. 얼마나 공을 들인 선전이자 마케팅이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프랑스가 ‘패션의 나라’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배경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왕권의 위엄과 신성함을 위해 귀족들에게 ‘사치’를 적극 권장하여, 안으로는 그들의 힘을 통제하고 밖으로는 프랑스에 대한 선망의 마음을 만들기 위해 내세웠던 국가 전략. 프랑스의 귀족들이 사치스런 연회를 매일같이 벌이고 먹는 것에 집착하였던 것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패션이라는 것 자체가 ‘안정된 생존을 보장받는 계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랑스의 미식과 프랑스의 패션은 모두, 고급스러움에 익숙한 상류층 '그들만의 잔치'로부터 출발했다. 프랑스 서민들의 패션이 ‘패션의 나라’와 관계없는 이유다.
초라한 프랑스 문화 실태
* 참고 자료 : 프랑스 패션은 '국가 주도적 정책의 산물'임을 뒷받침하는 자료 < 프랑스 패션 파워 형성의 배경이 된 사회·문화적 요인>, 조경숙 성균관대학교 예술대학 의상학과 교수 논문 http://asq.kr/1NaYC6ngi12j, '귀족들의 생활습관에서 유래'한 프랑스 패션 역사 요약 http://asq.kr/iRdpmO7BSrd7, 프랑스 패션 흐름 요약, 한국패션산업협회 https://url.kr/WUqjBb, 프랑스 패션 역사 연도별 상세 정리 외국자료 번역본 http://asq.kr/VNhIHzVj1IMV, 19세기 파리 서민들 모습 사진 출처 http://asq.kr/r1xp1xW9392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