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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09. 2020

프랑스 문화는 '로컬'이다. '만들어진 위대함'의 허상


 세계 문학의 중심이며 세계 미술의 중심이고 세계 영화의 중심이자 세계 패션과 미식의 중심. 어느 것 하나 ‘일류가 아닌 것이 없는’ 프랑스는 참으로 독특한 나라다. 보통 ‘세계 최고’가 붙는 수식어는 하나만 갖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어떻게 프랑스는 이 모든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무엇이 특별하게 다르고 어떤 우월한 문화적 인자를 가진 걸까. 그것이 궁금했었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프랑스의 문화 예술은 철저한 경제 전략으로 키워진 ‘국가 산업’이었고 평범한 국민들이 소외된 ‘상류층의 것’이었다. 전 세계가 다 알고 있는 ‘프랑스 패션과 프랑스 미식’을 프랑스 서민들은 모르고, 인상파 작가의 작품 앞에서 프랑스인들은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 모든 수식어와 영광은 곧 ‘프랑스 자신’이기에 따로 환상을 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프랑스 예술과 문화’라는 말 앞에 눈이 반짝이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프랑스 밖의 사람들이다.
 
 독보적으로 빛나는 프랑스를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은 ‘경외를 품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 초라한 나와 대비되는 위대한 자. 열등한 패배의식이 아닌 우월한 자부심을 간직한 자. 그러한 ‘투사의 대상으로서’ 프랑스는 더없이 훌륭한 환상 기제다. 내 모든 나약함을 보상하는 완벽한 힘을 가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스런 현실을 가려주는 ‘환상에 기대어 살기 때문에’ 그렇다.


1900년 '오뜨 꾸튀르' 쇼에 참가한 프랑스 최상류층 모습(좌) 1780년 설립된 프랑스 보석상 '쇼메'의 현대 상품(우)
프랑스 황실문화의 상징 '마리 앙뚜아네트'(좌) 고흐의 대표적인 그림이자 너무나 아름다운 '해바라기'(우)

 

 그러나 환상에 너무 많은 감정을 투사할 때, 우리의 현실 인식은 균형을 잃는다. 환상의 대상이 낭만적 기능을 넘어 스스로 목적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 바람과 기대와 희망을 과하게 투사한 결과다. 그렇기에 고흐의 해바라기는 그냥 그림이 아닌 ‘내 마음속 꺼지지 않는 빛나는 정신’이 되고, 모네의 수련은 ‘내 마음속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상태’처럼 느껴진다.

 
 ‘무진기행’과 ‘토지’는 몰라도 괜찮지만 ‘이방인’과 ‘레미제라블’을 모르면 문학적 교양이 없는 사람이 된다. 차갑고 불친절하며 기승전 침대라는 쾌락이 난무하여도 ‘프랑스 영화기에’ 우리는 거기서 고결한 실존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다. 프랑스 예술은 '세계적 기준'이라는 절대 권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권위가 어디서부터 온 것이고 그 기준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의 나라’ 뿌리는 궁정 예술을 탄생시킨 베르사유 체재로 올라가며 ‘착취 경제 전략’인 콜베르티즘으로 이행된 국가적 프로젝트와 연결된다. 대표적인 예가 미슐랭 레스토랑이다. 미슐랭은 1889년 설립된 프랑스의 유명 타이어 회사로 1900년 무료로 배포한 여행 책자에 레스토랑이 추가된 것이 ‘미슐랭 가이드’ 출발이다. 문제는 전문 평가단 자체가 지극히 ‘프랑스적 관점과 기준’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에게 타문화의 음식을 평가할 권리를 준 적이 없다. ‘프랑스의 자발적 평가’가 그대로 ‘세계의 기준’이 된 것이다.


1618년 유럽 귀족의 식탁 모습(우)과 현대의 '프랑스 레스토랑'음식(좌)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1933년 발행된 '미슐랭 가이드' 책자 표지(좌) 19세기 프랑스 농민들의 흔한 식탁 모습(우)


 중요한 건 왜 프랑스 타이어 회사가 앞장서서 프랑스 미식을 널리 알렸을까이다. 프랑스에는 고무가 나지 않는다 것에 힌트가 있다. 타이어를 만들기 위한 고무는 당시 식민지였던 베트남과 아프리카의 비윤리적 플랜테이션 노동에서 착취한 것이다. 미슐랭은 일종의 '국영 기업'과 같은 역할을 했고 그렇기에 프랑스적 프로파간다를 충실히 실행할 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프랑스 귀족들이 먹던 음식과 식사 예절이 오늘날 ‘프렌치 미식’이 되었고, 그들이 입던 옷과 장신구가 ‘프랑스 패션’이 되었으며, 그들을 위해 탄생한 작품이 ‘프랑스 미술’을 만들었다. 이러한

귀족 문화의 전수와 보존. 그것이 프랑스가 말하는 ‘전통’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문화’다. 프랑스가 세계에 전하고자 한 프랑스적 기준 ‘프랑스 왕실 문화’ 말이다.

그렇기에 정작 프랑스 문화 안에 프랑스 서민은 없다. 프랑스적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던 사람들은 귀족들과 그들을 닮고 싶어 한 부르주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가 시작된 16세기 전까지 프랑스 국민의 90%는 농민이었으며 ‘프랑스는 농민의 나라’로 불렸다. 1870년까지도 국민의 절반은 농민으로 ‘파리지앵’이라 불리던 부유층은 ‘기타’로 분류되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1863년까지 프랑스 국민들 ¼은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농민들은 부르주아에 대한 적대감이 높았다.


황실 상인 출신으로 1847년 보석상을 열었던 '까르티에'의 현대 상품. 1855년 나폴레옹 3세 황후 '외제니'와 귀부인들
1876년 르누아르의  <물랑 드 갈래트 무도회> 그림 속 부르주아들. 1920년대 패션계에 혁명을 가져온 프랑스 브랜드 샤넬


 인상주의 그림들이 활발하게 거래될 때에도 프랑스 서민의 절반은 ‘감자 먹는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대표 문화라는 ‘패션과 미식’에서 평범한 국민들이 철저히 소외되어 있는 이유다. 우리에게 알려진 프랑스 문화는 처음부터 서민들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문화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형식과 격식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것이 ‘겉모습을 가치 기준으로 삼은' 귀족 문화에서 왔기 때문이다. 프랑스 레스토랑에 나오는 음식들을 보라. 그들이 치중하는 것은 장식이다. 접시 위에 소스를 한 방울씩 떨어뜨려 놓은 모습이야 말로 ‘프렌치 미식’이 얼마나 극단적인 신경증의 산물인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것은 절대로 서민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프랑스는 문화 대국이라는 말은 ‘프랑스적 기준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정체성과 떨어질 수 없으며, 식민지 수탈이라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프랑스는 원래부터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라, 힘없는 나라를 침략하여 이룩한 부로 세워진 왕국이며 그 왕국의 귀족 문화를 국가 정체성으로 내세운 나라기 때문이다.


1853년 고흐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 프랑스 국민 절반이 이러한 모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프랑스 패션'도 '프랑스 미식'도 '프랑스 미술'도 없다
1902년 고갱의 <미개인 이야기>. 제목에 그가 타히티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대로 나와있다(좌) 장 레옹 제롬의 '무어식 바스' 노골적인 식민주의 시선(우)


 프랑스가 일군 문화와 예술이라는 것은 민중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닌, 위로부터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민중들의 삶과 관련이 없었고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수탈당한 나라들이 프랑스보다 훨씬 앞선 역사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이에 대해 숙고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프랑스의 문화 예술 발달은 ‘권력 수호와 경제력 증강’이라는 거대 정치 프로젝트였으나 ‘프랑스의 예술적 저력’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다. 프랑스가 그렇게 선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망각하고 있다. 오래전 프랑스는 문명이랄 것이 없던 초라한 땅이었다는 것을. 그들이 가진 것은 죄다 타문화를 모방하거나 약탈한 것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물질의 지배자가 된 프랑스는 그 시절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었다는 것을. 그 힘이 이 모든 기준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것을 우리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뿐이라는 것을.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문명을 전해준다'는 유럽인들의 선민 의식, 그 뿌리이자 '강력한 프랑스'의 상징 루이14세


 빅토르 위고와 보들레르와 랭보, 마네와 마티스와 부기뇽과 코코뱅은 ‘프랑스 로컬 문화’다. 우리에게 박경리와 윤동주와 기형도가 있듯, 신윤복과 이중섭과 김치와 된장이 있듯. 레미제라블은 세계 고전이 되고 토지는 안되는 이유는, 아카데미 영화제가 ‘미국 로컬’임에도 세계 영화제로 인식되었던 것과 같다. 힘의 논리로 재편된 질서인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의 기준으로 우리의 가치를 가릴 것인가.

 
 프랑스 로컬 문화가 세계적인 기준이 되어야 할 이유는 한 가지다. "프랑스의 자기팽창 욕망"

 이제 망각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
 





* 메인사진 : 오직 파리에서만 열리는 최상류층을 위한 <오뜨 꾸튀르쇼> '장폴 고티에' 작품

'진짜 위대한 예술'은 이런 것


* 참고 자료 : '프랑스는 농민의 나라'<Peasants Into Frenchmen> Eugen Weber  http://asq.kr/lIq6KZ33fa0X,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제임스 블로트 "유럽 중심주의는 식민주의에 대한 면죄부" http://bitly.kr/N4NX3CPrPdS, <르네상스의 어두운 부분> 월터 미뇰로 "르네상스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 팽창 정책에 대한 정당화가 이루어진 시대" http://bitly.kr/wll0gCkHpdZ, <문화와 제국주의> 에드워드 W. 사이드. 서구 위대한 대작들은 어떻게 정치에 협렸했는가 http://asq.kr/qSiRS3TopJoM, http://asq.kr/KzGWVM1J3hv4, <이방인>의 불편한 진실, 장정일 칼럼 http://asq.kr/qxYfCpyejjLj, 프랑스 영화의 식민제국 미화와 찬양 영문 자료 http://bitly.kr/WecDi9QaGkK, 프랑스 식민영화의 제국주의 정당화 선전 http://asq.kr/mLtx0zBKAF37, <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은 이유> 그리제다 폴록 http://asq.kr/pj8WHvSImsCq, 빅토르 위고가 노동자 탄압에 적극 가담했던 역사 영문 자료 http://asq.kr/QR71RGo4rsls, 루이 14세 문화예술 정책, 정치 헤게모니 잡기 위한 콜베르 전략 http://asq.kr/rGLBj77Zotra, 프랑스 미술 발달은 콜베르티즘 결과 http://asq.kr/xKD5BwwDrt45, 미슐랭 가이드 위키백과 http://bitly.kr/ahcvmV8Qa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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