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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Feb 10. 2020

봉준호,
괴물이 된 시대를 뚫고 선 이름

아카데미 수상, < 기생충 >으로 완성한 < 괴물 >의 화두


브런치를 시작하고, 한때 사랑했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나의 이야기를 해야 했었지요. 그때 쓰다 만 이야기들을 다시 써보려고 합니다. 본글은 2020년 2월에 썼던 글입니다.



 봉준호. 그가 완성하였다. 
 
 지난 봄 칸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이 그 시작이었고, 올 겨울 아카데미의 영광으로 그것은 완성되었다. 괴물이 된 시대를 만든 자들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의 수용과 선택. 이 일대의 '사건'은 서구사회가 견인하는 역사의 흐름에서 하나의 커다란 혁명에 견줄 수 있다. 우아한 나르시즘에 빠져있던 그들은 화들짝 놀라 '소외된 땅'에서 온 이 비상한 천재의 날카로움을, 그가 찌르는 가장 아픈 환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가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될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미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미국 비평가협회상을 줄줄이 독식한 그였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아카데미로 쏠렸을 때, 아카데미는 외국어 영화상 후보를 넘어 작품상을 포함한 주요 부문 6개 후보로 <기생충>을 올리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었었다. 그리고 오늘 '최후 고백'을 했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외국여영화상이라는 결과로!
 
 얼마 전 뉴욕 문화평론지 Vulture "한국 영화의 지난 20년간의 큰 영향력에도 오스카 후보에 단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봉준호는 대답했었다. "오스카는 국제영화축제가 아닌 로컬 축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미국 영화산업에 대한 진실이었으며, 미국인들은 변방의 이방인 감독에게서 그 진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스카는 올해, 스스로에 대한 이 진실을 깨기 위한 한 발을 내디뎠다.


  '기생충'을 이끈 주역들.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던 촘촘한 미장센


 수상대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여느 때와 같이 담담한 얼굴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깨친 자의 차분함.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자의 담백함. 그렇기에 어떤 영광도 그저 하나의 지나는 과정일 뿐임을 아는 자의 여유. 자신의 할 일을 알고 묵묵히 실행하는 자. 그리하여 언제나 '나 자신'일 수 있는 사람. 무대 위 영광으로 빛나는 모습과 감동은 우리들 몫이었다.

 그처럼 그는 어디서도 힘주고 있지 않다. 힘주어 무엇을 말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그의 모습은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응대할 뿐이다. 
 
 그것은 그가 만드는 영화와 닮아있다. 그가 만든 영화는 이미 '봉준호 장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는데, 분명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음에도 설교하려 들거나 직접적인 교훈으로 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예리한 메시지를 유머와 따스함 가족애 같은 인간적인 삶으로 녹여낸다.
 
 영화 기생충이 결국 '누가 그들을 기생충으로 몰고 갔는가'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진 것처럼, 봉준호 감독 영화의 뿌리에는 언제나 사회와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담겨 있다. 그것을 완벽한 상징으로 돌려 표현한 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괴물>이었다. 한국 최초의 '성공한 괴수 영화'. 하지만 <괴물>은 표면적으로만 괴수 영화이지 본질적으로는 사회와 시대를 날카롭게 고발한 '시대 풍자극'이다. 이 지점이 바로 봉준호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가장 차가운 얘기를 가장 온기 있게 들려주는 것.
 
 기생충이 박 사장 가족이 아닌 '기택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듯, 괴물 또한 '현서네 가족' 이야기로 풀어간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소외된 계층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존재했다. 


 한강 둔치에서 매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현서네 가족, 영화 '괴물'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독극물 방류라는 파렴치함 (2000년도 실제 같은 사건이 있었음), 최고 우방이라는 나라의 그 파렴치함의 결과로 생겨난 괴물, 괴물에게 피해를 당하는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늘 그랬듯 맞닥뜨리는 공권력의 무능함과 무책임함, 결국 또 약자들의 눈물겨운 각개전투.
 
 조용히 스미는 독이 어떻게 괴물이 되고 그것이 어떻게 힘없는 이들을 좌절하게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영화 <괴물>은 그야말로 오락의 형태를 차용한 이 시대의 '거대한 화두'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영화 괴물에 요란한 웅변은 없다. 대신 그 안에는 서늘한 메시지가 있었다. 바로 '누가 괴물을 낳았으며, 어떻게 괴물을 퇴치하여야 하는가'가 그것이었다. 그것은 누구나 말하고 싶었으나 누구도 말하지 못한 '조용한 혁명'이자 커다란 외침이었다.
 
 그리고 <괴물>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을 감독은 <기생충>으로 가져와 더욱 노골적으로 더욱 치밀하게 더욱 격정적으로 말하였다. 그렇게 '괴물이 된 세상'의 희생자들이 이제는 '기생충이 되어'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슬픔은, 봉준호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 세상을 환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기생충>이 완성한 것은 이것이다. '안으로부터의 혁명' 그에 대한 사유를 미루지 않는 것. 괴물이 된 시대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 


스스로 괴물과 맞서야 했던 '힘 없는 사람들' -  스스로 괴물이 되어야 했던 '갈 곳 없는 사람들'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받기는 커녕 핍박 당하는 '현서네' - 온 가족이 피자박스 접는 알바를 하는 '기택이네'


 최근 미국의 한 영화제에 참석한 봉 감독의 인터뷰 중에 흥미로운 질문이 있었다. 
"감독님의 영화는 사회이슈들이나 계급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요, 이 영화가 한국에서 사회혁명을 일으키는 시작이라고 봐도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대답이 그가 그동안의 영화들을 통해 던진 질문들의 총합이라고 여겨졌다.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거 같아요 세상이. 혁명이란 것은 뭔가 부서뜨려야 하는 대상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그게 뭔지, 혁명을 통해 깨뜨려야 되는 게 뭔지, 파악하기가 힘들고 복잡한 세상이 되고 있는 거 같아요"
 
"명확한 '악인'이 없는데도 비극적인 일이 터지잖아요.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없었는데. 그 질문 자체가 이 영화가 주려고 하는 메시지인 거 같아요"
 
 봉준호 감독의 이 말들에는 현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 담겨 있다. '명확하지 않은 적' 그러나 '불행한 개인들' 그것은 개인들 너머의 지점에 어떤 넘어설 수 없는 견고한 장막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보이지 않는 장막'이 우리를 '기생충'으로 만든 '괴물'이며, 그 모든 결과로써 우리는 오늘도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것은 바로 그 괴물, 우리들 스스로를 괴물로 만든 '그것'이라는 것을.

봉준호 감독의 오래 전 모습. 역시나 깊고 고요한 눈빛이 흐른다


 오늘 아카데미 시상의 가장 멋진 장면이자 모든 예술 모든 창작의 본질을 언급한 봉감독의 명연출이 있었다. 바로 감독상 수상 직후 한 말이다. 

"어렸을 때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을 하신 분은 우리의 위대한 마틴 스콜세지였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바로 앞 객석에 앉아있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가리키며 언급한 이 말에, 모두가 일어나 기립 박수로 노장 감독에게 화답하였고 이어서 봉감독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내일 아침까지 마실 겁니다"

 멋진 사람 봉준호 감독의 오늘의 영광에 깊은 고마움과 기쁨을 전하며 아울러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그래요. 아침이 밝도록 브라보!





필자의 기생충 리뷰


필자의 기생충 칸영화제 수상 글 


필자가 배우의 단상에 대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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