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인권의 나라. 문화와 예술의 나라. 미식의 나라. 패션의 나라. 그 많은 수식어를 가져도 그것이 진정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진짜 향기를 풍길 수 없다. 그랬다. 그 좋다는 프랑스에 왔건만 나는 이 나라가 지녔다는 진짜 향기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경험한 프랑스는 그보다는 억압과 차별이었고 배척과 소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건 나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언어도 생활양식도 식탁 예절도 ‘프랑스적 기준’에 맞게 바꿔야만 했던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잃는 고통으로 다가왔고 나의 고유성이 침해당하는 슬픔을 건네주었다.
프랑스인들은 겉으로는 지적이고 교양 있고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양에서 온, 말이 어눌하고 경제력 없는 나를 바라보던 그들 눈빛 속의 나는 분명 그들과 같지 않았다. 그것은 우월한 관점에서 열등한 자를 내려보는 시선이었다. 겉으로 웃음 짓고 있는 그들의 선명하게 다른 마음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그것은 나의 프랑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슴으로 생각하고 직관적으로 사고하는 내게 합리와 논리 중심의 프랑스 사고방식은 매번 좌절을 안겨주었다. 나는 자주 가슴이 답답했고 소외를 느꼈으며 무기력 했다.
주변의 프랑스 친구들도 남편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이성적 근거와 증명된 권위가 있지 않으면 부당함도 억울함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모든 가치의 중심에는 '이성적 권위'가 있었고 그것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기준이던 나와 머리가 기준이던 그들과의 갈등은 자주 ‘그들 방식을 내가 따름으로써’ 봉합되었다. 나는 이방인이었고 그것이 이 사회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합리적 사고’라는 권위를 통해 ‘절대 선’이라는 훈장을 달고 있었다. 자연히 나의 방식은 이성적이지도 문명적이지도 않은 ‘열등함’의 꼬리표가 붙었다. 그러한 프랑스인들의 ‘극한 자기중심성’은 커다란 억압으로 나를 짓눌렀다.
프랑스인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프랑스였고, 최고의 가치는 프랑스적 가치’였다. 그 안에는 깊은 우월의식과 보이지 않는 강요가 내재해 있었다. 자신들 것이 가장 훌륭하기에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생경한 상처 속에서 생각했다. 왜 이 사람들은 자꾸만 ‘틀’ 안에 가두려고 할까. 왜 이 사람들은 계속 ‘통제’하려고 할까. 왜 이 사람들은 ‘이성’에 지배되고 있을까. 무엇이 이 사람들을 뼛속까지 ‘우월감’ 속에 있게 했을까. 수많은 의문들과 질문들이 찾아왔고 나는 알고 싶었다. 내게 찾아온 상처과 슬픔을 이해하고 싶었다.
프랑스를 낯설게 보게 된 나의 글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나의 상처를 찾아가면서 그들의 상처를 보았다. 프랑스의 현재 모습과 과거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나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프랑스가 내게 상처를 주었고, 왜 나는 이곳에서 행복할 수 없었는지를 말이다.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건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자발성을 끌어낼 수 없기에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새로운 신 ‘이성주의’는 생각으로 우리를 감시함으로써 그것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감정을 억압하기에 우리를 본성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자유로운 문화를 지녔다는 프랑스인들이 원초적 욕망에 기대는 이유다. 원형을 상실하였기에 그것에 집착한다. 성에 탐닉하고 방탕한 문화를 만든다. 그들의 억압된 마음이 쾌락을 자유로 착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랑스 예술은 어둡다. 자조적 정서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랑스식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나 이타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자유를 우리는 코로나에서 충분히 목격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프랑스적 가치’에 깊은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앞서 있다’고 모두가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선진’이라는 말에는 깊은 함정이 숨어있다. 그들은 우월하고 우리는 열등하다는 분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내가 서있는 곳을 초라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이상향이 있을 거라는 허황된 꿈을 꾸게 한다. 그들은 선택받았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박탈감을 심어준다. 끊임없이 시선을 ‘외부’로 향하게 한다. 나 자신의 가치를 바로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프랑스가 보여준 자유와 평등은 균형을 잃었었고, 그들의 번영과 영광은 식민주의라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었다. 문명화 사명은 허위였음이 드러났다. 침략을 용인하고 수탈의 결과를 공유한 프랑스인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프랑스가 지배와 통제라는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그들이 ‘영광을 이룬 방식’이 거기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 ‘무력’이었기 때문이다. 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는 359점의 문화재를 약탈했고 조선의 여인들을 강간하고 폭행했다. 직지와 함께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문화재 반환요구는 여전히 묵살되고 있다. 프랑스가 식민지에 아직까지 사과하지 않고 있는 이유다. ‘힘의 논리’에서 그들이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 프랑스 정신 '계몽주의'는 인종차별 개념을 만들어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 파괴적인 인류학살에 영감을 주었다. 그들이 '이성은 선이고 무지는 악'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아버지 볼테르는 노예무역회사에 투자해 재산을 모았고, 자유와 평등을 만든 혁명 정부는 '이성 숭배'라는 종교를 만들어 전파했다. 자유의 여신상 마리안느가 탄생한 곳이다. 그러나 이성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깨운다는 논리는 자기중심적이기에 오만하고 불행하다. 모두를 ‘이성의 감옥’ 속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의 오만과 망각을 지탱한 건 '이성주의'에 기반한 자국민 ‘우월 교육’에 있었다. 우리의 열등 교육과 똑같은 ‘우민화 교육’이 모두의 인식을 규정했다. 한쪽은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하지 못하게 했고, 한쪽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했다. 그 마음이 ‘프랑스적 기준’을 세상에 강요하게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계몽 사명’은 프랑스가 ‘극한 외부’를 향해 떠난 꿈이었을 뿐이다. 진정 위대한 깨침은 나의 기준대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모두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 대승적 자비를 발현하는 홍익인간의 정신 말이다.
‘진보와 계몽에의 강박’이 유럽 중심주의를 퍼뜨리고 미화했다. 이상향이라는 환상을 쫓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프랑스를 통해 본 건 그 허구였다. "유럽인들은 일정한 잣대와 정해진 목적을 얻은 대신 삶의 강렬함을 희생했다. 유럽인들은 기술이 있는 미개인이자 지적인 야만인이다" 융의 이 말에 더욱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진정한 진보는 부의 확대와 기술의 발전이 아닌 ‘정신의 확장’에 있다. 그것은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가진 모든 허물과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결과라는 모든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용기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을 낮추는 마음에서 온다.
진정 ‘위대한 프랑스’는 그러한 모습에 있다. 힘없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열등한자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자기팽창의 광기로 세상을 파괴하는 것은 미숙한자의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진짜 우월한자는 타인과 세상을 포용하지 배척하지 않는다. 진짜 강한자는 강함을 뽐내지 않으며 모두 앞에 겸손할 뿐이다.
식민지배를 당했던 사람들의 피 속에 프랑스에 대한 증오가 각인되어 있는 한 프랑스는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들의 아픈 마음이 프랑스를 막아설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각성 없이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진실된 미래로 나아가는 길은, 모든 식민지들에 사죄하고 아이들에게 식민 역사를 교육시키는 것이다. 식민주의에 대한 면죄부인 유럽 중심주의라는 기울어진 인식의 균형 회복을 돕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자유와 평등’이라는 간판이 아닌, 진정으로 그것이 실현된 삶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우월하지 않다. 세상의 어떤 것도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각각의 고유한 숨결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훌륭한 문화가 있다. 프랑스라는 외부를 계속 바라보는 것은 우리 내부의 가치를 볼 수 없게 한다. 의식의 균형이 깨지게 한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 있던 시선을 돌려 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숨겨져 있던 보물을 만난다. 그것은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는 ‘나만의 고유성’이라는 보물이다. 현재를 살아낼 때에만 찾아지는 것이다. 코로나는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주었다.
'힘의 논리를 벗어난 아름다운 프랑스’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로부터 도망칠수록 신기루는 더 크게 빛나지만 여행의 끝에서 결국 그것이 꿈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프랑스에 없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치유는 상처의 직시로 시작된다
프랑스 삶, 상처와 치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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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정부 종교 "이성 숭배" 공화주의 핵심 사상 "진리와 자유의 달성을 통한 인류의 완전화" http://asq.kr/9eweYhabMukx (번역 http://asq.kr/sUPtKRz0VBdO) "프랑스는 지옥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낙원입니다" Sylvain Tesson http://asq.kr/wrmpBv53KEUl (번역 http://asq.kr/1TxJOAnrStyo), 파리 사는 미국인 엄마가 보는 프랑스 교육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이며 낡은 모델을 고수한다" "프랑스 어린이들은 생각하는 법이 아닌, 전통과 교훈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간다" "프랑스 가정생활도 낡은 구조" "프랑스 아이들은 면전에서는 순종적이지만 자기 통제력이 떨어진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 중심이 아닌 철저히 자신들만의 삶을 산다" https://url.kr/V9Zz8v (번역 http://asq.kr/MeohuRAIbcF5U), 프로이드의 심리성적 발달이론 '구강기 특징' http://asq.kr/Ke3E9XLXWTc8, 구강기 인격의 퇴행 특징 http://asq.kr/AT8ybJt40lNl, 루이14세 노예칙령 '코드 누와' http://asq.kr/SPhTUHib6PYe7, 병인양요, 프랑스군의 조선인 강간과 폭행 http://bitly.kr/BbwaLAx0zSM, 병인양요, 프랑스가 359점의 외규장각 도서 약탈, 반환 거부 http://asq.kr/I0xhsR5cMqQ5g, http://asq.kr/hEpoviToxkr7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