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야. 아직도 언니는 깨어있을 시간인데. 오늘 밤도 언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여름에 한국 가서 잠깐 얼굴 본 게 그새 아득하다. 그날의 강화도는 유난히 안개가 껴서 더 아름다웠는데. 언니는 오늘도 그곳을 혼자 걷고 왔겠지. 무심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침에 잠에서 깨어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어. 후두둑 빗소리가 들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티욜나무가 세차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 까만 철새들 무리가 저 멀리 지나가고, 고운 깃털을 가진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었어. 바람에 펄럭이는 나무들. 숲을 적시는 빗소리. 쏜살같이 날아가던 까치 두 마리. 그 풍경이 좋아 난 더 뭉그적거리며 한참을 누워 바라보았지.
아름답다. 아름답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생각하면서.
비가 오는 날들이어 설까. 요즘은 유난히 언니 생각이 나. 나의 깔깔마녀. 내 영원한 쏘울메이트. 알고 있을까. 그동안 나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나에게, 매일 마법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야.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가장 기뻐해 주었던 언니였잖아. 그리고 지금 내게는 나의 글을 기다려주고 응원해주는 많은 벗들이 생겼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해.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내게 일어날 수 있었던 걸까.
무엇보다 기뻤던 건, 내가 누구의 인정도 바라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나를 보였을 때, 그렇게 나를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이 그 마음을 알아봐 주었다는 거야. 난 거기에 가장 크게 감동했던 거 같아.
내가 나를 믿으니, 세상이 나를 믿어준 것. 그 기쁨과 환희를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처음 느껴본 감정이니까. 정말 처음. 언니가 잘 알잖아. 나는.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을.
세상에 나와보니, 세상이 달라 보여. 내가 전에 바라보던 세상과는 또 다르네. 이미 세상에 나가, 드넓은 세상을 질주하며 훨훨 날고 있는 우리 친구들도 떠올랐고 말야. 만수가 생각나더라. 대학로에서 고생하다가 이제는 배우로 성공해서 승승장구하는 우리의 칠득이 만수가.
한국에 갈 때마다 밥 사고 술 사고, 해 준 것도 없는 나한테 '프랑스 촌년'왔다고 챙겨주던 우리 촌놈 만수. 그 만수가 어느 날 나한테 했던 말이 생각나. "이제 뭘 좀 해야지"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보며, 할 수 있는데 왜 아무것도 안 하냐던 그 마음에 내가, 얼마나 고맙고 또 멋쩍었었는지.
어제도 글을 쓰며 생각했어. 언젠가 나도 만수에게 "나 실은 이런 거 하고 있어"라고, 웃으며 말해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고 말야. 그리고 그 날은 내가 만수한테 밥도 사고 술도 사려고. 물론 언니는 무조건 초대손님이지. 언니가 없는 술자리는 앙꼬 없는 찐빵이니까.
요즘은 성민 선생님의 그 말도 자꾸 생각이 나. 언니랑 같이 오래전 선생님이 연출하신 공연을 본 날이었지. 프랑스로 시집갔다는 얘기를 들으시더니 대뜸 내게 그랬어. "심심할 텐데... 거기 안 맞을 텐데.. 그냥 촌년이라 여기서 놀아야 할 건데..."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야. 그때 내가 말했었지.
"아뇨. 전 이제 다이나믹한 지옥은 싫어요. 그냥 심심한 평화가 좋아요. 그렇게 살래요"
선생님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바라보았어. 눈빛은 "아닐걸?"이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는 것을 살면서 더 뼈저리게 느꼈지. 정말로 이 곳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곳'이라 사무치도록 심심한 땅이거든. 너무 잘 정돈되어서, 너무 모범생이라서, 너무 빤히 보여서, 그렇게 모든 것이, 그저 매끈하게만 흘러가는 땅.
그래서 한국이 더 그리웠었나 봐. 그 들쭉날쭉함이, 약간 모자라 보이는 그 어눌함이,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 엉뚱함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철없음이, 무엇으로도 규정되어있지 않은 그 혼란스러움이. 그때는 그것들이 그토록 나를 불안하게 했었는데.. 지금은 그것들이 내겐 그리운 이름들이 되어있어. 전혀 매끄럽지 않은, 그 투박하고 촌스러운... 것들 말야.
성민 선생님 말이 맞았어. 나는 그냥 '촌년'이야. 그래서 이 땅의 '우아함'과 '문명'이 많이 불편했었지. 그래서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꼭 그렇게 부딪히지 않아도, 꼭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촌년의 모습 그대로, 나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렇게 만수가 품고 있는 그 웃음을, 나도 품고 살면 그만이라는 것을.
언니의 그 7년을 생각해. 그림 공부하겠다고 혼자 그 먼 곳까지 날아갔다가 말공부에 좌절하고 온갖 사건 사고로 힘든 시간 보내다 온 언니의 그 시간들을. 또다시 산산이 무너져버렸던 언니의 그 시간들을. 그리고 다시 나무가 흐드러져있는 집으로 와, 혼자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언니의 그 시간들을.
삶이라는 건 참 짓궂은 개구쟁이 같아.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삶은 다가오고. 그 너머의 시간들을 또 데려온다는 것은 말야.
언니의 그 웃음소리가 정말 듣고 싶다. 그리고 내년에 내가 한국에 가면, 우리 석모도에 같이 가자. 난 강화도도 좋지만 실은, 그 통통배 타고 들어가는 석모도 가는 길을 좋아하거든. 갈매기들한테 새우깡도 주고, 볼 것도 없지만 거친 파도가 치는 그 볼품없는 바다가 보고 싶어서. 언니가 옆에 있다면 더없이 좋을 거야.
혼자 있어도 밥 잘 챙겨 먹고, 혼자 있어도 잘 자고, 혼자 있어도 편안한 그런 가을 보내고 있어야 해.
불현듯 또 보러 갈게. 그때까지 잘 지내. 그리운 나의 깔깔마녀.
- 언니가 보고 싶은 가을, 철없는 친구가
* 모든 그림 : Georges Lacombe
내 아름다운 친구 빠스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