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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Jun 19. 2020

프랑스에서 먹는 명이나물, 봄이다!

브런치 우리가한식 공모전


 "엄마! 애기 달팽이가 있어!"
 
열심히 나물을 뜯고 있는 내게 아이가 외친다. "그래? 어디?" 쪼그려 앉아있던 나는 비스듬히 허리를 세워 아이에게 다가간다. "이것 봐! 진짜 귀엽지!" 아이는 달팽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잎 하나를 내게 내민다. 정말 작다. 이제 막 생겨난 연한 껍질은 싱싱한 잎만큼이나 어린 빛을 뿜어낸다. 방울방울 아침 이슬이 맺혀 있는 잎사귀. 또롱또롱 떨어져 달팽이 몸을 적셔준다.
 
 어릴 때부터 나물을 좋아했다. 밭일을 하셨던 외할머니 덕에 우리 집 밥상은 언제나 나물 풍년이었다. 새콤한 돌나물, 쌉싸름한 취나물, 칼칼한 콩나물, 고소한 참나물, 봄의 별미 쑥갓나물... 외할머니 밭에서 갓 딴 고춧잎을 쓱쓱 무쳐 먹고, 깻잎에 쌈 싸 먹고, 연한 마늘쫑을 뚝뚝 끊어 고추장만 찍어 먹어도 밥 한 그릇 뚝딱 비우던 날들. 그처럼 나물은 내게 밥과 떨어질 수 없는 누룽지 같은 것이었다. 그런 내게 커다란 시련이 닥쳤었으니, 바로 나물 없는 밥상이라는 처참함을 받아들여야 했던 프랑스 삶이었다.
 
 나물은 고사하고 김치조차 없는 휑한 밥상이라니. 그 어떤 채소도 없이 고기와 빵으로만 차려진 프랑스 어머님 식탁 앞에서 나는 얼마나 좌절했었던지. 나물만의 질감과 향기가 너무나 그리웠다. 나는 그것이 필요했고 그것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산나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달랑 시금치뿐이었다. 가끔 홍당무에 달린 여린 열무를 데쳐 먹거나 풋강낭콩을 삶아 된장무침을 해 먹는 것. 비트 잎이나 배추를 데쳐 먹는 것. 나물 흉내를 낼 수 있는 음식은 그게 다였다.


우리집 뒤 숲에 지천인 명이나물을 신나게 뜯어온 후
커다란 통에 담아 찬물로 깨끗이 씻어주면 먹을 준비 끝!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다. 우리 가족 밥상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웃 친구 빠스칼네에 식사 초대를 갔던 날, 샐러드에 섞여 있던 예사롭지 않던 풀이 한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은은한 마늘향이 나던 그 풀은 씹을수록 깊은 풍미가 일품이었다. "이 풀이름이 뭐니?" "곰의 마늘이라는 거야" "어디서 구했어?" "여기 바로 숲에서. 너네 집 뒤에 큰 티욜 나무 있지? 거기 밑에 잔뜩 있어!" "뭐라고!!!"
 
 명이나물이, 그것도 자연산 명이나물이 우리 집 바로 뒤에 있었다니! 그것도 봄마다 자라고 있었다니! 
나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음날 소쿠리를 들고 바로 올라가 보았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 눈앞에는 초록빛 가득한 명이나물 잎들이 이른 봄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었다. ‘이건 정녕 꿈이 아닌 거야’ 발 밑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마늘향은 고향의 흙냄새를 불러왔다. 엄마랑 동생들이랑 나물 뜯던 날들을. 하하호호 손에 흙 묻히며 누가누가 더 많이 뜯나 내기하던 날들을. 명이나물 밭 한 가운에 있는 것만으로도 묘한 위로를 받았던 그날, 나는 소쿠리 가득 나물을 뜯어 집으로 가져왔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헹궈낸 다음 한 잎을 서둘러 입에 넣어본다. 아삭 거리는 식감. 얇은 잎 사이로 흐르는 옹골찬 기운. 적당한 마늘향에서는 개운한 청량감까지 느껴졌다. 눈이 밝아지는 맛. 지금껏 먹어 본 어떤 풀과도 다른 독보적인 맛. 장아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살아 움직이는 맛. 신선한 명이나물은 나물 결핍증 속을 헤매이던 나의 미각을 깨우기에 충분하였다. 오호라. 이제 봄은 너로 정했다!


명이나물 몇 장을 겹쳐 넣고 돌돌 말은 김밥
칼칼한 닭갈비에 곁들여 먹고, 야채튀김에 싸 먹는 명이나물. 먹어도 먹어도 계속 들어가는 맛!

 

 '심봤다'는 이럴 때 쓰는 말일게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다. 쑥과 깻잎을 먹을 수 없던 땅에서의 설움이 단번에 씻겨 내려갔다. 이 천상의 음식으로 해 먹고 싶은 요리들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필시 엄청난 영감을 지닌 풀임에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명이나물은 유럽에서는 예로부터 ‘신성한 풀’로 여겨졌으며 ‘백마법’에 쓰이는 식물로 전해져 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름이 ‘곰의 마늘’이라는 것도, 자생지가 고대 켈트인의 주거지였던 것도, 그 마을 이름이 ‘단겐’이라는 것도 모두 단군신화를 떠올렸기에 흥미로웠다.
 

 미식가인 엄마를 닮아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는 명이나물을 한 잎 먹자마자 눈에서 별빛이 뿅뿅 그날로 바로 광팬이 되었다. 그 후로 봄이면 우리는 매일같이 집 뒤에서 명이나물을 뜯어다 먹는다. 싱싱한 명이나물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일 년 중에 딱 한 달 정도가 다이기 때문이다. 처음 우리가 나물을 뜯었던 날은, 이웃집 할머니들이 창가에 쪼르르 서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산나물을 캐 먹는 문화가 없기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뜯고 있는 우리 모습이 신기했던 거다. 그러고 보니 이 많은 명이나물을 몰라서 아무도 못 먹고 있었다. 전부 우리거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지금도 여전히 우리만 갖다 먹고 있다. 이런 횡재가!

  
 명이나물이 가장 맛있을 때는 하얀 꽃대가 올라오기 전, 순한 초록빛이 적당히 남아있을 때이다. 그때가 야들야들하니 먹기에 가장 적기다. 고기를 먹을 때도 깻잎 대신 쌈 싸 먹고, 닭갈비를 먹을 때도 같이 곁들여 먹고, 국수를 먹을 때도 송송 썰어 넣어 먹고, 김밥을 말 때도 넣어 먹고, 튀김을 먹을 때도 우적우적 함께 먹으면 그렇게 상큼하고 맛있을 수가 없다.   

 

계란물 쓱쓱 입혀 부친 명이나물 전.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산마늘 음식이다
구운 송이 버섯을 곁들인 백년초 국수에도 싱싱 명이나물 투하해서 먹고, 잣과 올리브오일로 페스토 만들어 먹기


 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밀가루와 계란물을 쓱쓱 입힌 명이나물 전이다.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깻잎전을 응용한 것이다. 적당히 물기가 묻어 있는 명이나물 두 장을 앞뒤로 밀가루를 듬성듬성 묻힌 다음, 계란물을 쓰윽 입혀서 노릇하게 부쳐내면 끝. 고소한 부침개의 맛에 명이나물만의 알싸한 마늘향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환상의 맛이 탄생한다. 봄에 집에 식사 초대를 할 때면 이 비장의 카드를 내놓곤 했는데, 모두가 그 자리에서 쓰러질 만큼 행복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완벽한 맛이니까!


 싱싱한 나물은 매일 그렇게 먹고, 나머지는 장아찌를 담거나 페스토를 만들어 오래 두고 먹는다. 특히 올리브유와 잣 파마산 치즈를 섞어 만든 페스토는 작은 덩어리로 냉동실에 보관하기에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명이나물은 마늘향이 베이스로 깔린 것이기에 모든 음식과 궁합이 잘 맞는다. 어떤 식재료와도 튀지 않고 보조를 맞추며 음식 맛을 풍부하게 더해 준다. 거기에 우유의 몇십 배에 달하는 칼슘이 들어있고 항암제로도 쓰였으니 영양은 말할 것도 없다. 까다로운 우리 모녀의 입맛을 사로잡은 명이나물의 파워다.


 언제나처럼 이른 봄이면 나와 아이는 창 밖으로 자주 고개를 내민다. 명이나물이 얼만큼 자랐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주말쯤 뜯으러 가면 되겠다" "야호!" 아이는 환호한다. "이번엔 달팽이들하고 조금만 놀고 엄마랑 같이 뜯는 거야?" "음. 그건 생각해볼게!" "그래. 넌 놀아.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봄마다 향긋한 명이나물 냄새가 끊이지 않는 프랑스 우리 집. 우리는 그새 내년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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