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Feb 27. 2021

내 영원한 깔깔마녀에게


언니, 나야. 아직도 언니는 깨어있을 시간인데. 오늘 밤도 언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여름에 한국 가서 잠깐 얼굴 본 게 그새 아득하다. 그날의 강화도는 유난히 안개가 껴서 더 아름다웠는데. 언니는 오늘도 그곳을 혼자 걷고 왔겠지. 무심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침에 잠에서 깨어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어. 후두둑 빗소리가 들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티욜나무가 세차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 까만 철새들 무리가 저 멀리 지나가고, 고운 깃털을 가진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었어. 바람에 펄럭이는 나무들. 숲을 적시는 빗소리. 쏜살같이 날아가던 까치 두 마리. 그 풍경이 좋아 난 더 뭉그적거리며 한참을 누워 바라보았지.

아름답다. 아름답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생각하면서.
 
비가 오는 날들이어 설까. 요즘은 유난히 언니 생각이 나. 나의 깔깔마녀. 내 영원한 쏘울메이트. 알고 있을까. 그동안 나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나에게, 매일 마법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야.
 

언니랑 같이 건던, 강화도 그 길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가장 기뻐해 주었던 언니였잖아. 그리고 지금 내게는 나의 글을 기다려주고 응원해주는 많은 벗들이 생겼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해.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내게 일어날 수 있었던 걸까.


무엇보다 기뻤던 건, 내가 누구의 인정도 바라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나를 보였을 때, 그렇게 나를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이 그 마음을 알아봐 주었다는 거야. 난 거기에 가장 크게 감동했던 거 같아.


내가 나를 믿으니, 세상이 나를 믿어준 것. 그 기쁨과 환희를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처음 느껴본 감정이니까. 정말 처음. 언니가 잘 알잖아. 나는.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을.

세상에 나와보니, 세상이 달라 보여. 내가 전에 바라보던 세상과는 또 다르네. 이미 세상에 나가, 드넓은 세상을 질주하며 훨훨 날고 있는 우리 친구들도 떠올랐고 말야. 만수가 생각나더라. 대학로에서 고생하다가 이제는 배우로 성공해서 승승장구하는 우리의 칠득이 만수가.


언니가 데려간, 파도치는 그 바닷가


한국에 갈 때마다 밥 사고 술 사고, 해 준 것도 없는 나한테 '프랑스 촌년'왔다고 챙겨주던 우리 촌놈 만수. 그 만수가 어느 날 나한테 했던 말이 생각나. "이제 뭘 좀 해야지"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보며, 할 수 있는데 왜 아무것도 안 하냐던 그 마음에 내가, 얼마나 고맙고 또 멋쩍었었는지.


어제도 글을 쓰며 생각했어. 언젠가 나도 만수에게 "나 실은 이런 거 하고 있어"라고, 웃으며 말해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고 말야. 그리고 그 날은 내가 만수한테 밥도 사고 술도 사려고. 물론 언니는 무조건 초대손님이지. 언니가 없는 술자리는 앙꼬 없는 찐빵이니까.


요즘은 성민 선생님의 그 말도 자꾸 생각이 나. 언니랑 같이 오래전 선생님이 연출하신 공연을 본 날이었지. 프랑스로 시집갔다는 얘기를 들으시더니 대뜸 내게 그랬어. "심심할 텐데... 거기 안 맞을 텐데.. 그냥 촌년이라 여기서 놀아야 할 건데..."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야. 그때 내가 말했었지.


"아뇨. 전 이제 다이나믹한 지옥은 싫어요. 그냥 심심한 평화가 좋아요. 그렇게 살래요"   


선생님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바라보았어. 눈빛은 "아닐걸?"이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는 것을 살면서 더 뼈저리게 느꼈지. 정말로 이 곳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곳'이라 사무치도록 심심한 땅이거든. 너무 잘 정돈되어서, 너무 모범생이라서, 너무 빤히 보여서, 그렇게 모든 것이, 그저 매끈하게만 흘러가는 땅.  


곱게 여문, 우리의 시간을 닮은 강화도


그래서 한국이 더 그리웠었나 봐. 그 들쭉날쭉함이, 약간 모자라 보이는 그 어눌함이,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 엉뚱함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철없음이, 무엇으로도 규정되어있지 않은 그 혼란스러움이. 그때는 그것들이 그토록 나를 불안하게 했었는데.. 지금은 그것들이 내겐 그리운 이름들이 되어있어. 전혀 매끄럽지 않은, 그 투박하고 촌스러운... 것들 말야.


성민 선생님 말이 맞았어. 나는 그냥 '촌년'이야. 그래서 이 땅의 '우아함'과 '문명'이 많이 불편했었지. 그래서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꼭 그렇게 부딪히지 않아도, 꼭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촌년의 모습 그대로, 나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렇게 만수가 품고 있는 그 웃음을, 나도 품고 살면 그만이라는 것을.


언니의 그 7년을 생각해. 그림 공부하겠다고 혼자 그 먼 곳까지 날아갔다가 말공부에 좌절하고 온갖 사건 사고로 힘든 시간 보내다 온 언니의 그 시간들을. 또다시 산산이 무너져버렸던 언니의 그 시간들을. 그리고 다시 나무가 흐드러져있는 집으로 와, 혼자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언니의 그 시간들을.


삶이라는 건 참 짓궂은 개구쟁이 같아.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삶은 다가오고. 그 너머의 시간들을 또 데려온다는 것은 말야. 


숲 속에 나무를 지고 걸어가는 여인이 꼭, 우리 모습 같아

 

언니의 그 웃음소리가 정말 듣고 싶다. 그리고 내년에 내가 한국에 가면, 우리 석모도에 같이 가자. 난 강화도도 좋지만 실은, 그 통통배 타고 들어가는 석모도 가는 길을 좋아하거든. 갈매기들한테 새우깡도 주고, 볼 것도 없지만 거친 파도가 치는 그 볼품없는 바다가 보고 싶어서. 언니가 옆에 있다면 더없이 좋을 거야.


혼자 있어도   챙겨 먹고, 혼자 있어도  자고, 혼자 있어도 편안한 그런 가을 보내고 있어야 .
불현듯  보러 갈게. 그때까지  지내. 그리운 나의 깔깔마녀.


- 언니가 보고 싶은 가을, 철없는 친구가 

* 모든 그림 : Georges Lacombe



내 아름다운 친구 빠스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