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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Apr 10. 2020

봄향기와 함께 마스크가 왔다.


 겨울의 끝자락부터 우리 발을 묶어 놓은 코로나로, 봄이 왔는데 봄을 제대로 응접 하지 못하는 아쉬운 이 봄. 순한 바람과 함께 올라온 창 밖의 연녹빛이, 이처럼 경이롭고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더 귀하게 바라보게 되는 봄.

 며칠 사이 연한 녹빛은 제법 진한 빛으로 바뀌어 그새 온 곳을 무성하게 물들여놓았다. 아침마다 새들의 재잘거림이 더욱 활기차게 들려오고 까치는 더욱 경쾌하게 쪼르르 날갯짓을 한다. 꽤 오래된 오른팔의 통증 때문에라도 열심히 요가 매트를 펴놓은 채 스트레칭에 몰두하는 나의 아침. 팔을 쭉쭉 뻗을 때마다 창 밖으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녹빛의 숲 풍경 앞에 깊은 감사함이 솟아난다. 생각할수록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고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삶은 우리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허물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오래 전 남편이 생일날 사준 노란 꽃다발


 모든 흐름이 끊겨있는 세상. 새삼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감사함이 솟구친다. 혼자되신 어머님이 아버님과 함께 살던 큰 집을 내놓았을 때 아버님의 손길이 안 간 곳이 없는 시골 별장을 내놓았을 때, 모두들 금방 팔리긴 힘들다고 했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두 집이 극적으로 모두 팔렸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어제는 진한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오늘은 바삭한 수제 돈가스를 내일은 참기름 듬뿍 맛있는 김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어갈 때 나와 내 가족이 이렇게 건강하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어김없이 따스한 봄볕이 세상을 비추고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매화꽃이 보고 싶었다. 사진을 정리하다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봄 아버님이 서재에 꺾어다 놓으셨던 매화꽃 사진을 찾아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봄, 아버님 서재에 꽃혀있던 매화꽃


 언제나 말없이 미소 지어주시던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셨다. 하얀 이젤 앞에 앉아 평생을 매달 한 작품씩 유화를 그리셨던 아버님. 이 꽃 사진 하나만으로도 아버님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몇 년 전 남편이 생일날 사주었던 노란 꽃도 예뻤지만, 어서 이 날들이 지나 뻥 뚫린 초록 들판에서 이름 없는 들꽃들을 보며 맘껏 거닐고만 싶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제 몸을 맡겼다가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서있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 이름도 없는 저 바람 같은 꽃들 속을 말이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꽃과 풀을 좋아했다. 공원에 가면 언제나 잔디에 한참을 앉아 민들레와 토끼풀과 떨어진 나뭇잎들을 주워 작고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 매번 엄마에게 가져다주곤 했었다. 그 통통한 작은 손으로 만들어준 손보다 더 작은 꽃다발을 보며 나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어느새 훌쩍 엄마의 턱까지 자라 버린 너이지만, 엄마 마음속에서 너는 언제나 엄마의 작은 새란다. 엄마가 너를 아프게 했을지 모를 모든 마음들까지 다... 돌려주고 싶은 새.


언젠가 어느 바닷가 들판을 걷다가 찍은, 바람에 날리는 들꽃


 한국에서 보내준 마스크가 어제저녁에 도착했다. 보낼 때 한 달이 걸릴 거라고 해 걱정했었는데 역시나 한국은 우리를 걱정 속에 놔두지 않았다. 가능한 모든 비행기에 전국에서 몰려든 교민 가족들을 위한 마스크 택배들을 꽉꽉 채워 보냈을 것임이 틀림없다. 보낸 지 십일 만에 부모님이 보내신 마스크와 친구가 따로 보낸 면마스크를 함께 받은 것이다.


 한국 가족들에게 폐 끼치기 싫어 무엇을 보내달라고 일부러 부탁을 하지 않고 살았었다. 그래서 남들처럼 이런저런 것들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느낌을 안다. 한국에서 날아온 소포를 뜯는 순간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고 설렘인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지니는 정서적인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한국 가족들이 보내준 상자를 먼저 열어보았다. 말로만 듣던  마스크들이다. KF94 마스크, 황사 마스크... 보자마자 감동이 밀려온다. 마치 문명에서 소외된 자가 문명것을 경외롭게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것들은 내게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자 귀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특별함이기 문에.


한국서 날아온 귀한 선물들, 메이드 인 코리아 마스크!


 그리고 친구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남편 것부터 아이 것까지 형형색색 들어있던 너무 예쁜 마스크들이 한가득 들어있다. 친구는 고맙게도 내가 읽고 싶다던 책도 함께 넣어 보냈다. (참고로 외국에서 한국책을 선물 받는 것은, 황금을 선물 받는 것과 같다)

 남편이 검은색 마스크를 바로 써보더니 딱 맞다며 하나를 바로 현관 앞에 챙겨 놓는다. 내일 빵 사러 갈 때 쓰러 갈 거란다. 아이는 토끼와 강아지가 그려져 있는 마스크를 보더니 예쁘다며 하나씩 써본다. 빛깔이 너무 곱던 보라색 마스크는 모두가 다 자기 거라며 탐을 내었다.

 풍성한 마스크 속에 둘러 쌓여 있으니 무언가 든든한 빽이 생긴 것처럼 안심이 된다. 그동안 마스크가 없어 나도 모르게 불안해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새삼 마스크들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 귀한 것들이, 이제 우리에게도 생겼구나.


아이가 어렸을 때, 공원에서 엄마에게 만들어준 꽃묶음


 한국의 동생은 5월 1일 바로 다시 또 보내줄 거니 열심히 쓰라며 연락을 해왔다. 잘 받았다니 친구도 기뻐하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고마운 가족과 친구가 이렇게 곁에 있으니.

 그나저나 행복한 고민이 생겼다. 이제 요일별로 '마스크 드레스 코드'를 정해야 할까 보다. 일단 내일은 봄향기 가득한 꽃무늬 마스크를 쓰고 장을 보러갈까 한다. 아마도 너무 예뻐서 사람들이 다 쳐다보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 봤자 매일 입는 그 바지에 그 티셔츠에 그 벙거지 모자지만. 그래봤자 집 코앞에 장 보러 가는 거지만. 중요한 건 예쁜 '메이드인 코리아 마스크'가 패션의 완성이 될 거라는 것!

 이제 곳간을 채웠으니, 쌀만 푸면 될 것 같다. 절로 봄노래가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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