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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15. 2019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다.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36화 


 나의 고통이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자각이 있었음에도 내 안에는, 남편과 시어머니라는 '나의 대극'을 현실에서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융의 소식지에서 보았던 한 문구가 내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자비는 정의를 이긴다' 저 말을 보자마자 알았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화두가 정확하게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그것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순간 그것은 '분리'를 만들고 '대극'을 만들어 중심점을 본성과 먼 곳으로 옮겨놓는 것이었기에. 이겨내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와 '대치 구도'에 놓이게 되므로, 그 '힘겨루기'는 언제나 너무 큰 에너지 소모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겨내야 하는 것은 없었다. 극복해야 하는 것도 없었다. 단지, 내 마음속에 대극을 만들어내는 분리의 작용만이 있었으므로 그 분리되어 있던 마음을 거두면 되는 것이었다.
 
 모든 현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안다면, 모든 감정이 제 스스로 흘러가도록 둘 수 있으며 모든 이의 말과 행동이 더 이상 나의 중심을 흔들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의 말과 행동에 '걸려서' 스스로 넘어지고 말았다. '나의 감정'이 그것들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존재의 수용.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그것이었다. 그들의 어린 영혼을 받아들이고 나의 어린 영혼을 받아 안는 것. 그렇게 서로의 서툰 마음들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자비'이고 그것이 나를 '정의'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존재의 수용 앞에 어떤 분별이나 시시비비, 옮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기에. 
 

너는 거기 있다. 나는 여기 있다. 우리는 함께 있다


 그렇듯 끊임없이 소란스러운 세상 안에서 나는 고요하게 머물 수 있었다. 내가 그 모든 '현상들'에 휩쓸리지 않았었다면. 하지만 나는 기어이 나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그렇게 제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를 구속하였던 것은, 좋고 나쁨 자유와 부자유를 나누어 스스로를 고요의 자리에서 멀리 내쳤던 '내 마음의 상들'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대가로...


그렇게 남편을, 시어머니를, 프랑스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되었었다.

나에게 '그림자'가 있듯 그들에게도 똑같이 그림자가 있으며, 그들의 그림자는 그들만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기도 하였기에. 


하지만 나는 대극에 있는 그들을 밀어내기에 급급했었다. 이질적인 성질은 내게 불편함으로만 다가왔었기에, 융화할 수 없는 성분은 내게 너무 많은 인내를 요구했었기에. 


 이것은 비단 삶에서 만나는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의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까지 연결돼있는 것이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경험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들을 탓하기보다 나를 한번 더 돌아보는 것. 그렇게

자기에게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과제'를 회피하지 않고 완수한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 체게융


그러려면 먼저 나는 '현재를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저 진흙창 같은 '나의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찾아야 할 답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기에.
 

'현재를 살고 있지 않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의식이 나의 내면을 향해있지 않고 밖을 보는 순간 외부를 향해있는 순간, 나는 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한 점의 부유하는 입자일 뿐이기에, 어디로든 휩쓸려나갈 상태로 나를 내치는 것이기에.
 
그렇게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했었기에, 내 마음은 오랫동안 '외부의 힘'에 점령당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이 있어야 할 곳에 공간이 생겨버려 거기로 온갖 것들이 들어와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랬기에 나는 타성에 휘둘렸고, 습에 휘둘렸고, 타인에 휘둘린 채로 '휩쓸려 다녔었
다'는 것을. 때론 '업력'에 의해서도...


이 무시무시한 '무의식의 힘'을 융은 알고 있었다. 내가 통과한 시간들은 정확히 그가 말한 것이었다.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 두고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몇 배의 힘으로 되돌아와 우리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과거는 무서울 정도로 바로 여기에 실재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립니다."


충분한 몸값을 치르지 못했던 나는 기어코 그것에 삼켜졌었고, 나만의 지옥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되찾은 후에야. 


모두를 껴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삶


중심을 잡는 것이란, 현재를 사는 것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과 인연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게 나를 보는 것. 순간 속에 사는 것.


 나는 나의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 언제나 현재로부터 도망쳤었고 저 멀리 공중에 떠 있었다. 그렇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했었고 나에게 다가오는 시간들을 진정으로 살지 않았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주도권'이 없어서 나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모두에게 화살을 돌렸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강력한 주도권이 있었다.
바로 내 마음의 주도권.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라는 명징한 주도권.
  


그것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그것만으로 나는, 더 이상 이해받아야 할 필요도 만족스러울 필요도 없던 것이다. 나는 이미, 스스로 충분하기 때문에 스스로 풍요롭기 때문에. 나는 우리는, 그러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의 어두운 곳을 거쳐야 하고 모든 것을 뒤로 제쳐 놓은 채 자신의 짐을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아무도 그 짐을 대신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삶이 가져오는 모든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만의 삶을 완전히 살 수 있습니다"


온전한 수용만이 진정한 길임을 말한 융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모두와 조화로울 수 있는 잔잔함으로 피어나는 것이었다. 






* 메인 그림 포함 모든 그림 :  
Vincent van Gogh

* 융의 말 출처 인용한 순서대로 : 체게융 '기억, 꿈, 사상' p. 275-277, '체게융 서간집 2권' p. 76-77 (원서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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