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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16. 2019

상극의 땅.
내가 반드시 발 디뎌야 하는 땅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37화


 모든 열쇠가 '수용'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모든 관점들이 완전히 새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관계 맺기에 서툰 사람이었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이었으며 권위를 어떻게 세우는 건지를 모르는 사람에 가까웠다.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굼뜨고 느리며 모두가 익숙한 것들에마저 많이 서툰 사람이었다. 그렇게 내가 '땅 위에서' 내 삶의 주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땅의 법칙'에 서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편과 시댁은 나를 '하드 캐리'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았다.
 
나의 그런 모습들, '무기력'에 가까워 보이던 모습은 그들에게 '무능력'으로 비쳤을 테고,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방식으로, 그렇게 물질세계의 법칙대로 나를 도와주고자 한 것뿐이었다는 것을. 그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 나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저 나만이 불평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해야만' 나의 분노가 정당화될 수 있었기에. '적'을 상정해 놓아야만 나의 두려움을 가릴 수 있었기에. 
 

 그것은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아이가 엄마에게만 유독 화가 나고 친절하지 못했던 건, 내가 아이에게 내 모든 '존재의 외로움'을 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저 스스로 꿋꿋하지 못하고 아이만을 바라봤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아이는 그러한 '나의 상태' 내가 보내는 '무의식의 신호'가 버거웠던 것이다. 그것이 아이에겐 '짐'이었던 것이다. 
 
또한 나는 아이에게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무의식으로 계속 보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감정을 다 흡수하였던 아이는, 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눈길과 마음을 다 읽었던 것이고 '자신의 뿌리'이기도 한 아빠를 할머니를 미워하는 엄마의 감정이 불편했던 것이다. '아빠'를 부정함은 '아이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아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아이는 내게서 전해지는 그 '무의식적 배경'이 아팠던 것이다. 
 

언제나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보이지 않는 감정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처럼 나는 '행복의 기준'을 철저하게 '외부'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한 때는 남편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그러한 나의 태도는 '타인의 존중'과 '타인의 인정'이 내 행복을 가르는 기준이었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있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행복의 관점 그 기준점을 '나에게로 '옮겨오면 되었었다.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존중하느냐,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신뢰하느냐. 그 관점은 나의 대극에 있는 남편에게도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었다. '나는 얼마나 남편을 존중하는가' '나는 얼마나 남편을 신뢰하는가'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이미 오래된 환멸만이 떠다니고 있었기에. 그로 인한 원망만이 가득했었기에. 신뢰는 당연히 없어진 지 오래였기에. 
그 마음으로 내가 오래도록 남편을 대하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남편이 나를 존중하고 신뢰하며 다정히 대해주기를 바라 왔을까.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모순'이었다.
 
 문제의 출발은 언제나 '나'에게 있었다. 외부의 모든 '불편한 것들'은, 다른 누구와도 다른 어디라도 또 다른 형태로 늘 만나는 것이었다. 너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서, 모든 관점이 다 부딪혀서, 언제나 서로에게 상처가 되어서, 결국 서로를 마음으로부터 포기해버린, 그래서 오랜 미움과 슬픔을 머금고 살았던 세월. 그러나 
 
그러했던 남편이 결국은 내게 '최고의 짝'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만큼이나 '상극의 성분'인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가 알고자 했던 '생의 물음'에 대한 답도 찾지 못했을 것이었기에. 남편이 옆에 있었으므로 결국 나는, 내가 쥐고 있던 마지막 저항의 끈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남편이 나를 절벽에서 밀어주었기 때문에...
 
내게는, 살갑고 다정하고 나를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남편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는, '대극과의 전쟁'을 선사해줄 사람, 그리하여 그 대극 너머로 나를 떠밀어줄 수 있는 사람만이 필요했었음을 알았다.
 

지금의 남편은 그러기에 나에게 최고의 상대 'Best of me' 였다는 것을. "사랑해"라는 그 한마디를 실은 나도 오래도록 진심을 다해 건넨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남편 역시 그 한마디를... 그 마음 하나만을 기다렸었다는 것을.
  

거친 땅 위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기. 대극이 땅 위의 존재들에게 찾아오는 이유

 
 언제나 '불편한 것'이 우리를 깨운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었다. 상극이기에 융화할 순 없지만 '다름'을 통해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나와 다른 그들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 내가 경험으로 학습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물질을 다루는 법, 관계를 능숙하게 맺는 법, 험한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 나 또한 남편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문명인으로 길들여져 잃어버린 생명력, 그것을 나는 회복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을 배우고 체득하여 삶 속에 이식하는 것. 그렇게 '균형 잡힌 자아'로 땅 위에 튼튼하게 서는 것.
 
대극은 이처럼,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쌍둥이'이며 가장 정확한 '상보 관계'이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었다.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자. 그리하여 내가 잃어버린 한쪽을 돌려줄 단서를 가지고 있는 자. 그렇게 '인연'이 성립되는 것이었고 그것이 세상의 순리였다. 그렇게 그 모든 '다름'과 그 모든 '그림자'를 수용하는 것. 그렇게 거친 땅 위에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는 것.
 
대극이 나를 찾아오고 나를 집어삼키고 나를 부순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었다. 
 
 넘어서야 할 무엇이란 없었다, 언제나 '받아들이는 것'만이 있었을 뿐. 그저 우리는 겁먹은 채로 길목에 서서 망설이고 있었을 뿐. 하지만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되었었다. 내 한마음을 바꿔서 힘주고 있던 내 어깨에 힘을 빼면 될 일이었다. 
 
겁먹은 나그네의 코트를 벗게 하는 건, 같은 힘으로 몰아세우는 바람이 아니라, 한결같은 빛을 그저 비출 뿐인 '따스한 태양의 존재'라는 것을. 
 
또 다른 시간의 길 위에서 담담하게 받아 안는다.




* 메인 그림 포함 모든 그림 : Vincent van Go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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