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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17. 2019

행복의 비밀.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38화


 나는, 내가 '현재를 살지 않음'을 어떻게든 합리화시키기 위해 무엇에든 '의존했어야 했음'을 알았다. 그것이 한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한 때는 '온갖 꿈의 세계'였으며 한 때는 '세상 너머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그저 '의존의 대상'만 바뀌어 왔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오래된 학습에 의해 '고통의 감정'에 더 익숙해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행복한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보다는 '외로움의 감정'에 익숙해 있었고 '불행감'에 더 익숙해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절벽의 끝에서... 내 모든 '익숙한 감정들만을' 소환하였었다. 
 
나는, 내게 친숙한 감정들을 내게 익숙한 습대로 '취사선택' 하였었음을 알았다. 그 감정에 힘을 주어 증폭시키고 그것만이 나의 지난 삶을 이룬 '그릇'이라 규정한 것이었음을. 

나는 그 순간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었음을. 나는 '행복'을 선택할 수도 있었음을.
 
현재를 산다는 것은, 내게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현재를 사는 것은 '그러하였다'는 생각과 '그것이었다'는 규정의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내가 만든 그 생각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었다.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은 과거에 갇혀있는 것이었다. 미래를 염려하는 것도 과거에 갇혀있는 것이었다. 그 학습된 불안 그 두려움이 미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한 가지 빛깔만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실은 언제나 여러 빛깔로 춤추고 있었음을, 오로지 나의 한 생각만이 그것이 '그 빛깔만을' 가지고 있다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생각이 고통의 불씨를 만들었고, 그 생각에 힘을 실어주자 나의 인식은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였다.
나의 현재와 시간을 갉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그것이 사라지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에 부여한 힘을 빼는 것이었다. 그것이 생겨난 근원, 내가 만든 규정, 한 가지 형상으로 굳어버린 나의 그 '생각을 틀 안에서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 한 생각이 더 이상 '그 모습으로만' 머물러있지 않을 때, '내가 만든 규정이 성립되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그것들로부터 생겨난 '고통'이라는 실체 없는 이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음을. 그것이 현재를 사는 것이며 자유를 얻는 것이었음을.
 

노란 바다가 생명을 얻었다. 그것이 내 선택이었기에 


모든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모습이 다르게 펼쳐지는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다는 의미는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므로 나는 불행도 행복도 모두 선택할 수 있다. 계속 불평하고 원망하며 과거에 머물러있느냐, 그럼에도 여기서 빛을 발견하고 현재를 사느냐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나는 '불행하기만' 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불행하였으나 행복하였고, 나는 불행하지만 행복하다. 그리고 나는 얼마든지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 내가 불행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나는 불행할 것이고, 내가 행복하고자 마음 내었을 때 나는 행복할 것이기에.

행복과 불행은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부여한 의미에 의해 생명을 얻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나'였다. 오로지 그 사실만이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진실이었다.
 
 
모든 불편함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마음을 낸다면, 그것은 저 멀리가 아닌 바로 내 앞에 이미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챌 수 있다. 
 
그렇게 나에게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저항을 멈추고 껴안는 것. 그것이 현재를 사는 것이고 나를 수용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나를 과거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자유라 부른다는 것을.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내가 무엇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그것을 '이해하고 싶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내 마음 때문이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나의 이해를 돕고 나를 불편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나는 보라색 파도이기도 하고, 그 파도를 만든 바다이기도 하다


 이 땅에 살면서 느낀 불행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태껏 '나의 뿌리가 잘려진 그 환부'가 계속 아팠던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나의 고국으로부터 나의 가족들로부터 나의 모국어로부터 '단절된 상태'이기에 아픈 거라고. 그러나 그 환부는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내가' 잘라낸 것이었고, 그 통증을 그대로 두었던 것 역시 '나' 자신이었다. 
 
돌아가야 할 나의 뿌리는 무엇이었던가. 나를 이룬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근원은 그것 하나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나란 존재는 우리란 존재는 그렇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아니었다.
나의 뿌리는 한국이기도 하지만 한국어이기도 하지만, 남편이기도 하고 아이이기도 했다. 
 
나의 뿌리는 저 푸르른 산이기도 했고 저 눈부신 햇살이기도 했고 오물이 진동하는 시궁창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무엇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어디에도 가둘 수 없는 드넓은 존재였다. 

오로지 나의 좁은 생각만이 나를 가두었었고 부자유로 데려갔었다. 
 
비로소 돌아간다는 것은, 내가 난 땅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서있는 땅에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을 의미했다
.

현재에서 도망칠수록 나는 삶에서 멀어져 갔고 나 자신에게서 멀어져 갔었기에. 

나 자신이 된다는 것, 나 다워진다는 것, 그것은 현재를 살아내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삶. 무엇과도 정답고 풍요로운 마음. 그것은 현재를 살아내는 이에게만 찾아오는,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기에.

 
 
 


* 메인 그림 포함 모든 그림 : Georges Laco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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