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Oct 19. 2019

가슴이 열리고,
요정의 마법이 일어나다.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40화 


 내 안에 있던 '내면의 아이'를 다시 찾아내고 안아준 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막혀있던 나의 가슴이 비로소 열렸음을 뜻하였고, 나를 가로막던 두려움이 사라졌음을 뜻했다. 내 안에는 평안함이 깃들어 있었고 지금껏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깊은 관대함이 세상을 향해 방사되고 있었다. 
 
 나의 가슴에서는 한없는 사랑에너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흐릿했던 세상이 보다 선명해졌고 모든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고유하고 소중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삐딱한 시선들이 자취를 감추고 대신 그 자리에 존재에 대한 너그러움이 가득 차 올랐다. 전에는 부딪히고 싶지 않았던 문제들과 관계들이 더 이상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고 먼저 손 내밀게 되었으며, 세상 속에 섞이는 것에 더 이상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더 이상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모든 것에 활기가 넘쳤다. 
 
그 마음 그대로 남편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법이 일어났다. 
 
 나는 남편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바라보았다. 아무런 편견이 없던 때로 돌아가 존재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 안에는 오로지 깊은 따뜻함만이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남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완전하게 열렸음을. 그러자 그가 그동안 느꼈을 외로움과 슬픔 고통이 그대로 다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가 문명인으로서 훼손당한 생명력의 고통까지도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나의 시선이 변한 순간, 내가 다시 남편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본 순간, 남편이 나에게 보내는 공기와 태도가 똑같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즉각적이고 정확했다.
 
 내가 아무 말하지 않았어도, 내가 보내는 그 마음 만으로 남편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온화해진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시 따뜻한 공기를 회복하게 되었다. 오직 그 마음만으로.
 

나를 먼저 껴안아야 남을 안아줄 수 있다


 그랬다. 그 모든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나의 관점이 '가슴으로' 내려와야만 했었다.
나는 지난 몇 달간 머리로는 명징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 앎이 가슴으로까지 내려오지 못했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가슴을 활짝 열고 남편을 바라보자 마법처럼 남편의 마음 또한 변한 것이었다. 가슴이 열리지 않으면 그 어떤 '변용'도 끌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그 모든 것을 다 한 것이었다. 감정이 '사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개체로서 경험한 모든 감정, 그 감정을 실은 생각이 우리의 삶과 우주의 모든 서사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경험들 앞에 먼저 겸손해지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것이 있게 한 감정의 뿌리는 언제나 '나'에게 있으므로.
 
 그것은 아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내가 스스로 충분하며 풍요로운 마음으로 나를 대하자, 엄마에게만 
날이 서있던 '아이의 태도'가 사라졌다. 아이는 더 많이 웃었고 나도 더 많이 웃어주었다. 결국 남편과도 아이와도 '내 마음'이 변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보내는 '무의식의 신호'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기한 경험은 '물질의 변용'으로도 이어졌다. 내가 가슴을 활짝 열자마자 그 마음으로 모두를 대하자마자, 십 년은 늙어버렸던 내 얼굴이 순식간에 예전의 얼굴로 돌아온 것이다. 심지어 전보다 더 맑게 피어있었고 피부는 이십 대의 피부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탁해졌던 얼굴이 다시 돌아옴을 목격한 것, 그렇게 마음이 신체의 변화를 끌어내었음을 본 것은 그 자체로 전율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무섭도록 정확한 우주의 순리였다. 그처럼
 
내 마음이 지어낸 '감옥'을 부수자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 제자리를 찾은 것. 그것은 지팡이를 든 요정의 마법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정의 지팡이가 지나가자, 어둠 속에 무지개가 떴다  - William Monk


 그렇게 나는 남편을 볼 때마다 전에는 안 하던 살가움을 계속 보여주기 시작했다. 일부러 한 마디라도 더 말을 걸고,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마주치고, 한 번이라도 더 손을 잡아주었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남편이 타박을 할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발랄하게 하곤 하였다. 아이는 그런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고 남편은 그런 아내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곰 같기만 했던 아내'에서 조금은 토끼 같은 아내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온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알을 깨고 나온 후가 더 중요하였다.

축축한 몸으로 세상에 나와 낯선 공기에 적응하고 부단히 걸음을 떼어야만 하며, 그렇게 하나씩 '노력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겨울에 혼자 한국에 갔을 때 가끔 찾아뵙는 마사지 아줌마를 뵈러 간 적이 있었다. 신통한 능력을 가진 그분이 사실 '사람이 보이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분이 내 등 쪽을 누르시며 말씀하셨다. "여기가 막혀있네.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살면 그래" 거기는 정확히 가슴 게 명치의 뒤쪽, '가슴 차크라'라 불리는 자리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돌아온 후에야 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 그 말은, 
 
나를 분노하게 한 것들에 대해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말하라는 것이었음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야기하고 '내 존재의 기쁨'을 표현하라는 것이었음을.
 
 그렇게 '나'를 말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빠르게 돌아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자체로 '나 자신'이었고 현재를 살고 있었으며 너그러움 속에 있었기에. 그 너그러운 나는, 자신에게 더 솔직하고 편안한 숨으로 존재하는, 그래서 세상과 더 조화로운 나였다.
 
 
나는, 내 안에 솟아 오른 새로운 생명을 본다. 무엇보다 빛나는 그 숨결을.





 * 메인 그림 : Edvard Munch


이전 27화 내 안의 상처 받은 아이. 고통의 씨앗을 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