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Oct 22. 2019

고유한 나로 살기.
나를 세상에 펼치다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 맺는글


나의 삶은, 정확하게 '나의 열망대로' 흘러왔다. 

 
 어린 시절, 상처가 내 안에 자리 잡은 이후로 언제나 '삶의 고통' 그 뿌리를 찾고 싶었던 나. 오로지 그것을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생을 건너왔던 나. 그 '강력한 나의 의지' 나의 그 생각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었음을 알았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으나 언제나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그 하나의 물음이 나의 생을 관통하여왔다는 것을. 나는 그것을 '대면'하고자 하였었기에 그것들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는 것을.
 
나의 삶이 그러한 형태로 흘러온 것은 '신의 예비됨'도 아니요 '운명'도 아니요 '나의 강력한 한 생각' 그것이 모든 길을 통과하게 하였던 것이다. 다만 그 답은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울퉁불퉁한 자갈밭을 비천하게 걸으며 살이 찢기는 고통을 견뎌야만 했었다. 
 
 꿈이없는 아이였던 내게 한가지 소망은 '언제나 깨어있는 것'이었다. 나는 늘 깨어있고 싶었다.
세상이 시키는대로 세상이 말하는대로 세상이 만들어놓은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삶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내 소망대로 나는 걸어왔다.
나의 삶이 편안하고 안락하고 만족스러웠다면 나는, 깨어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삶이 불편했기에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나는 깨어있을 수 있었다. 그러려면 나는 먼저 '외로운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나는 정확히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나의 생을 걸어온 것뿐이었다.
  
그 모든 고통의 시간들은 삶의 시련들은 나와 상관없는 '외부로부터' 뚝 떨어져 나타난 게 아닌, 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나의 '내부로부터' 한치도 어긋남 없이 펼쳐진 것뿐이었다.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


 내가 이 곳, '가장 멀리 있는 땅'으로 와 살아야만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삶의 답을 외부에서 찾고자 했던 '극한 의존 심리'였다. 

그러나 고무줄을 끝까지 잡아당기면 다시 원위치로 튕겨져 돌아간다. 그처럼 '극한 외부'를 향해 내가 떠났던 건, 극한의 외로움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임으로써 '대극의 끝'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무너진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중심으로 환원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음을. 
 
 답은 내부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했던 나의 무지는, 당장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했던 비겁함과 만나 기어이 답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대극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뒤에야 비로소 나는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찾는 답은 어디 다른 곳이 아닌 내 안에 있었다는 것. 그것 하나를 알게 하기 위해...

그렇게 나는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하여.

이처럼, 내가 삶을 이해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답은 글이나 경전 속에 있지 않았다. 우리의 삶은 불교 글귀 안에서 문장 속에서 만져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경험' 생생하게 살아 숨 쉰 채로 나를 찾아온 '모든 순간의 삶 속에'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더듬더듬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도'닦는 것이 아니었다. '닦여지는 것'이었다. 경험이라는 '시련'을 통하여.
그것은 일부 사람들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단지 삶을 외면하고 거부하는 자와, 응접하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있을 뿐.  
 
그러하니 '정신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을 뿐인지.


가장 깊고 고요한 곳에 있던 너는. 나였다


 우리가 자연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감동을 받는 것도 이와 같았다.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있는 것.
바람이 불면 몸을 맡겨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 비가 오면 축축이 젖은 몸을 겸손하게 숙이고, 가을이 오면 다 내어준 몸 앞에 시들시들 해졌다가, 겨울이 오기 전 제 한 몸을 땅에 던져 땅과 하나가 되는... 그렇게 봄을 위해 말없이 자신을 버리는. 그리고 혹독한 계절이 지난 후 어느새 봄 볕에 피어나는 가장 순한 빛.
 

자연은 아무 말이 없다. 아무 불평도 없다. 그저 의연하게 계절을 견디고 기꺼이 자신을 던지고 다시 기쁘게 봄을 맞이할 뿐이다. 오직 '인간들만이' 불평한다. 바람이 세다고 빗물이 차다고, 가을은 쓸쓸하다고 겨울은 슬프다고. 찬란한 봄의 공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까맣게 잊은 채.
 
그저 존재하는 것.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 안에서 기쁨이 되는 것. 말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었다. 자연의 위대함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존재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 
 

우리는 그러한 '자연의 일부'였다. 그러니 자연의 순리를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자연으로 돌아갈 때' 그렇게 '자연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였다.

 이렇듯 우리의 생에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생은 너무나 촘촘히 짜여진 하나의 직물과 같았다. '나의 생각'이라는 날실과 '나의 감정'이라는 씨실이 서로 정교하게 교차하며 그에 딱 맞는 상대를 데려와 꼭 필요한 사건을 만들고 경험을 지어내는, 삶이라는 건 그 어떤 것보다 섬세한 예술품이었고 고유한 마법의 상자였다.

 

저 하늘의 빛을 안고 나는 세상으로 떠오른다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삶'에게 불평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을 원망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상황'을 탓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내게로 오는 모든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껴안는 것뿐이다. 그것들에 미소 짓는 것이다. 그렇게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나의 현재를 사는 것이다. 


일체유심조. 그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그러기 위해서 나는,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거나 누군가의 이해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의 만족을 위해 애쓸 필요도, 무언가가 되어야 하거나 무엇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고, 내 존재의 모습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며, 그것이 내가 이 세상과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만나는 순간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슴 뛰는 고요 속에서 나는, 나의 지나온 시간들을 세상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고통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며, 나라는 개체를 통해 세상에 전해진 고통이고, 그 고통으로 내가 치유받은 것 또한 나만의 경험이 아닌 세상과 함께 나눠져야 하는 치유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내가 통과한 아픔과 기쁨을 나는 그저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나를 쓸 수 있었고 그렇게 나의 글은 시작되었다.


 그러한 시간을 가져다주었고 그러한 나를 되찾게 해 준, 나의 그 시간을 함께 건너 준 남편과 아이에게, 영원과 찰나 속에 함께하는 나의 또 다른 분신들에게... 나의 글을 바친다. 
 
 




* 본 글을 끝으로 본 매거진은 종료됩니다. 그동안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뒤이어 미방영분 '그 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기대해주세요. ^^

이전 29화 생명력의 회복. 창조성이 깨어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