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동물 찾기
♪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
자연스레 드라고를 외쳤다면 당신은 최소 20대 후반 이상이다. 꾸러기 수비대는 원더랜드를 지키는 열두 마리 동물 대원 이야기로 1990년대 인기리에 방영된 만화다. 열두 마리 동물이라는 콘셉트에서 알 수 있듯 십이지신 동물을 캐릭터로 만든 것이다. 갑자기 십이지신과 추억 만화 출연에 이 글은 사주풀이인가, 추억팔이인가 헷갈리실 분들을 위해 미리 이야기한다. 이 글은 지극히 닮은꼴 이야기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 닮았다는 말을 꾸준히 들었다. 지겨울 법하지만 지겹지 않았던 이유는 시기별 장소별 닮은 동물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꾸러기 수비대에 나온 웬만한 동물들도 내 얼굴을 스쳐갔다. 흔한 동물부터 시작하겠다. 사람 얼굴을 흔히 강아지상과 고양이상으로 나누지만, 나는 개냥이상인가 보다. 부먹 찍먹 논란을 대하는 태도로 친구들은 나를 두고 개니 고양이니 열띤 토론을 했다. 부르부르도그부터 골든 리트리버, 페르시안에서 코리안 숏헤어 고양이까지 종마저 구체적이니 괜히 그럴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익숙하지만 의외였던 동물도 있다. 대학교 1학년 연합 MT를 갔는데 학기 초라 학생들이 쭈뼛거리며 겨우 통성명하는 분위기였다. 성격 좋아 보이는 선배가 나에게 불쑥 다가와 얘기했다.
“어머, 얘. 너 진짜 암소 닮았다.”
맥락도 개연도 무찌르는 첫마디였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고 의외로 선배의 의견을 흔쾌히 수긍했다. 성별 알리미는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왠지 모르게 암소 닮은 애로 각인되었다가, 온갖 푸성귀를 손으로 집어 먹는 습성을 들키고 나서는 토끼나 양까지 닮은꼴이 확대되었다.
입은 옷에 따라 닮은 동물도 바뀌었다. 회색 후드를 입으면 톰급 제리, 노란 코트를 입으면 어깨 넓은 트위티였다. 하얀 원피스라도 입으면 어김없이 백돼지가 되었다. 백돼지는 동네 어르신들의 작명 센스인데 내 얼굴이 하얗고 튼튼했으니 설득력은 있었다. 기분 나빠지기 애매하도록 어르신들은 복스럽다는 말을 꼭 덧붙이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복은 내 다리까지 퍼졌는지 우람한 허벅지를 보며 언니는 말이냐고 했고, 언니와 몸싸움을 할 때마다 겁박하는데 꽤 유용했다. 협박으로만 몸을 쓴 건 아니다. 꾸러기 수비대 뱀 캐릭터인 요롱이의 전기 감전된 입 모양을 기막히게 따라 해 언니를 즐겁게 했고, 집안 분위기가 쳐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메기 소녀가 되어 메기의 추억을 불렀다. 인중 양옆으로 “\인중/” 이런 주름을 만들면 메기수염을 만들 수 있는데 저 표정은 우리 가족 웃음 치트키였다.
이쯤 되니 ‘왕좌의 게임’ 속 다면신 능력자 아리아 스타크 부러울 게 없다. 물론 아리아는 적어도 사람으로 변하지만. 사실 꾸러기 수비대 동물 외에도 끝이 없다. 학생들은 내 잠재력을 최대치로 올려줬는데 코카콜라 흰색 곰, 피카츄, 리락쿠마, 오버워치 정크랫을 비롯해 배스킨라빈스에서 날 목격했다며 보여준 동물은 바다표범이었다. 한 번은 겨울에 너무 추워서 패딩 안에 패딩을 입는, 나름 패딩 레이어드(라고 이름 붙이고 싶었던) 스타일을 연출한 적이 있다. 하얀 롱 패딩 안에 보라색 패딩을 겹쳐 입고 있었는데 빈 틈 없는 여자가 되고 싶었는지 턱 끝까지 지퍼를 올렸다. 수호랑 탈이라도 쓴 것처럼 버스를 누비다 겨우 하차했다. 같이 내린 한 남자가 날 빤히 보더니 말을 걸었다.
“초면에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되게 미쉐린 같아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것 맞다. 동물은 아닌데 인간도 아닌 한 번쯤은 지나쳤을 타이어 모델. 하얀 패딩이 사방으로 울룩불룩했으니 미쉐린은 양반이었다. 참신한 드립에 빵 터져서 둘 다 공룡 입김을 내뿜으며 웃었다. 그리고 쿨하게 제 갈 길을 갔다.
지금도 지인들은 지나가다 나를 봤다며 별의별 사진을 보내준다. 하다못해 채팅창 이모티콘도 나를 닮았단다. 딱히 요구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관찰력과 열정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덕분에 다소 난해한 이 글을 읽으며 열심히 내 얼굴을 상상해 볼 독자들을 생각하니 이상하게 흐뭇하고 궁금하다. 당신이 그린 내 얼굴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미지 출처
san-X 공식 홈페이지, 나무위키, 비마이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