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말 영주권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인터뷰 의무화, 서류 심사 강화 등 반이민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 중이던 영주권 취득의 예상 소요 시간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그럴수록 우리의 초조함 또한 커져만 갔다. 미국에서 비자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큰 불안감과 지속적인 비용 지출이라는 큰 마음과 경제적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만료 기간이 다가오면 갱신에 필요한 서류 챙기랴, 변호사 선임과 수속 비용을 위한 돈 모으랴, 심사가 무사히 통과될지 노심초사 걱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그 무게감은 겪어보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힘든 고충이기도 하다. 그래서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급으로 근무하는 영주권, 시민권을 가진 직원들보다 똑같은 업무량으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번외로 신경 써야 할 인생의 무게가 더 큰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분 유지를 위해 더 잘하고 잘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나는 당연하게도 알고 있는 여러 종류의 취업 비자들이나 영주권 프로세스 등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동료들을 봤을 땐 정말이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장기적인 꿈을 안고 살아가는 많은 외국인들이 궁극적으로 갖고자 하는 첫 꿈은 '영주권'이다. 영주권을 얻는다고 해서 미국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자에 비해서 훨씬 자유롭고 추가적인 신분 관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상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영주권을 갖고자 노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표방하고 그 매력을 찾아온 외국인들은 그 진정한 '자유'를 영주권을 얻고 나서야 만끽하곤 한다. 이직을 위한 도전을 하고 싶어도 비자 때문에 이직에 제한이 있거나 번거로운 프로세스 때문에 채용 과정 자체에서 필터가 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에 외국인으로서의 설움을 가장 많이 느끼게 되는 제약이기도 하다. 나 또한 다른 글들에서도 언급을 많이 했지만 뜻하지 않던 OPT 분실 사고로 인해 합법적 체류를 위해선 선택지가 없었고, 신분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한 회사에서 내 커리어를 이어왔어야만 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항상 나중을 위한 경력과 경험을 다지는 시간으로 생각했지만 2017년 말에 영주권 프로세스에 들어가고 난 이후부터는 일종의 '희망 고문'으로 인해 하루가 1년 같은 기다림을 갖고 더 큰 취업 시장에 뛰어들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 기다림이 매우 고통스럽기도 했다.
2017년 말에 들어가게 된 영주권 수속은 적정 임금 검증, 구인 광고 (일반 미국인들에게 해당 포지션에 대해 유명 주간지 등을 통해 구인 공고를 내고 채용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가 영주권 스폰서를 하려는 사람의 대체자 혹은 동등 수준의 노동력을 구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은 무사히 통과되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인증하고 검증하는 LC (Labor Cerification)라고 불리는 노동청 리뷰 단계에서 발생되게 되었다. 미국 노동청에서는 영주권 스폰서의 악용을 방지하고자 문제가 있는 지원자들 심층 리뷰 외에도 랜덤으로 지원 케이스를 골라서 심층 리뷰를 진행하는데, Random Audit이라고 불리는 과정이 있다. 보통 그 사례에 뽑히게 되면 심층 리뷰를 하는데 90일 정도 시간이 추가로 소요된다. 그렇다. 우리는 딱 그 케이스에 뽑히게 되었다. 하루가 1년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나에겐 100년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초조함이 생기게 되었다.
전에 다른 글에서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Random audit 통보를 받은 날은 우리의 첫 결혼기념일이었고, 결혼기념일을 맞아 미국 서부로 여행을 갔다가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둘의 첫 결혼기념일 여행은 기억이 매우 흐릿한 여행 중 하나로 남아있을 정도로 무슨 정신으로 여행한 지 기억이 없는 여행이기도 하다. 진행이 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긍정적인 상황이었지만 하루하루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우리에겐 큰 절망스러운 소식이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당연히 아무 문제없이 audit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Combo card라고 불리는 여행허가서와 노동허가서를 받게 되었고, 취업에 있어 훨씬 자유롭게 되었다. 주 신청자가 아닌 부 신청자로 들어갔기에 훨씬 빠르게 이직 도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건이 가능했을 때 바로 이직에 도전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직을 하고 난 이후 힘들게 버티고 있는 동료들이나 부하 직원들이 마음에 많이 걸리게 되었다. 이럴 땐 스스로가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하고 이기적이지 못한 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기회가 되자마자 도전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적어도 내가 맡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잘 마무리하고 안정적인 상황이 되면 이직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반년 정도를 더 회사에 남기로 결정했다.
트럼프 행정부 때 영주권 인터뷰가 의무화되면서 수속 시간이 매우 길어지게 되었고, 우리도 손꼽아 인터뷰 날짜가 정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고 영혼까지 말라가는 듯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런 여러 가지 압박감이 회사 생활을 하는 것에 더욱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고, 도저히 회사를 다지면서 이직 도전을 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다. 이직 준비와 면접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었고, 조금의 휴식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나는 아내에게 퇴사를 하고 빠르게 이직 준비를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고용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미래에 대해 어떤 것이 보장된 것이 아님에도 퇴사를 결정하는 것은 아주 큰 리스크를 가지고 오는데, 아내는 철저히 나를 믿어줬고 괜찮다고, 좋은 결정이라며 나에게 큰 힘이 돼줬다.
잠깐의 휴식 기간 동안 내가 5년 반 동안 일을 했던 것들에 대해 정리를 시작했다. 정말이지 회사의 주인처럼, 회사가 강조하는 ownership을 가진 직원으로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았다. 퇴사를 하고 나니 정말 신기하게도 연기처럼 과거의 기억으로 묻혀 갔는데,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내 열정을 쏟아붓고, 내 회사처럼 노력하고 일에 집중했는데, 결국 마지막에 든 생각과 남은 것은 허무함 밖에 없었다는 게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물론 그래도 한 곳에서 그렇게 경험을 쌓은 것은 이직 도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이 아무리 잦은 이직을 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너무 잦은 이직은 좋지 못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경력만큼은 큰 플러스가 되었다.
가고 싶었던 회사들에 이력서를 수 백통을 냈는데 면접으로 진행되는 케이스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 곳과 면접을 진행했는데, 조건이 맞지 않거나 연락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로의 취업 도전에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내가 바라본 스스로의 장점은 '열정'과 '진정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을 이력서에 표현할 수 없음이 늘 아쉬웠다. 아무리 커버 레터에 그런 내용을 포함시켜도 마음에 와 닿게 전달하는 능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정말 가고 싶던 회사에 사전 녹화 형식의 화상 인터뷰도 봤지만 연락을 받지 못했기에 이번엔 더욱 적극적으로 나를 '영업' 하기로 했다.
커리어 웹사이트에 나와있는 직급에 지원을 하고 나는 무작정 뉴욕에 있는 지역 본사에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그리고 다른 글에서도 소개했지만, 사무실 문 앞에서 운명의 인사 담당 부사장님을 마주치게 되었고, 내가 방문한 이유를 들으시곤 내가 그토록 이력서에 표현하고 싶어 했던 '열정'과 '진정성'이 보인다며 좋아하셨다. 그리고 나는 정식으로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 행동은 분명 어떤 관점에선 잘못된 것이었다. 회사의 지원 사이트에는 온라인 지원서만 받겠다고 in-person 지원서는 받지 않겠다고 되어 있었는데, 나는 빈틈을 노렸다. 온라인으로 이미 지원을 한 상태였고, 추가적으로 내 지원서가 확실하게 연결되기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이 회사에 가고 싶은지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얘기했고,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냐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용기 내어 도전 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는 이 회사에 지원할 수 없는 리스크가 있는 도전이었지만 스스로 누군가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성공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도전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12월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담당하는 VP, 그리고 뉴욕 맨해튼 지역을 담당하는 Regional Director와 면접을 마쳤고, 큰 만족감과 합격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채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다사다난했던 2018년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