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에서 찾은 정체성과 깨달음.'
미국으로 돌아와 색다를 것 없는 일상을 지내며 요하네스와의 만남은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추억팔이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딱 19개월로 정해진 미국에서의 삶이 너무 소중했기 때문이다.
일상으로 복귀한 뒤, 동료들과 즐겁게 지내던 어느 날, 이곳에서의 삶이 정확히 1년이 되었을 무렵, 그동안 잠잠하던 나의 ‘무모함’이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남은 6개월을 계속 ‘안전하고 아름다운 힐튼헤드 섬’에서 보낼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대도시’에서 살아볼 것인가? 점점 커져가는 갈증 속에서 여러 번 고민을 했고, 결국 결정을 내렸다.
'샌프란시스코로 가자'
친구와 동료들한테 샌프란시스코로 가겠다고 말하니 모두들 뜯어말렸다. 멕시코로 혼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는 미국 친구들이 뜯어말렸었는데, 샌프란시스코를 간다고 했더니, 이번엔 필리핀 친구들이 뜯어말렸다. 특히 원어민 수준의 영어에 고급 리조트에서 셰프로 6년간 일한 경력이 있던 Mark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는 영어를 나처럼 하는 것도 아니고, 호텔 프런트데스크 경력도 고작 2년뿐인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업을 어떻게 구할 거야? 나도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3개월간 일을 못 구해서 다시 돌아왔잖아. 거기 가봤자 돈만 날리고 시간만 낭비하게 될 거야. 가지 마. 그냥 우리랑 남은 기간 즐겁게 지내자! 너 가면 후회하고, 결국 힐튼헤드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베프였던 Lala와 Faith도, 상사였던 Helena도, 심지어 주말 야간에만 일하던 미국 중년 아저씨인 Tim도 모두 말렸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고집을 꺾을 내가 아니다. ;;
“망해도 내가 망하는 거니까 일단 가볼게. 갔다가 후회하고 다시 돌아오면 되지 뭐!”라는 게 나의 답변이었다.
엄마는 이런 나의 결정을 듣고 두려움에 잠을 못 이루며 점집을 갔다고 한다. 사실 미국에 오기 전에도 갔던 곳이다. 그때는 “얘는 미국 가서 남편을 만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고. 이번에 그의 답변은, “냅둬. 얘는 그냥 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냅두면 알아서 하니까 걱정 말고” 였다고 한다 ㅎㅎ
정들었던 힐튼헤드를 떠나기 전, 호텔의 총지배인이었던 Mr. King에게 직접 쓴 감사의 편지와 사진을 전했다. 동료들에게도 함께 찍었던 사진을 주면서 그동안 너무 즐거웠다고 마무리 인사를 한 후,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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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기숙사 같은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2인용 방을 잡아서 6개월 간 장기투숙을 할 생각이었다. 그곳은 샌프란시스코의 딱 중심지에 있음에도 가격이 저렴했고, 또 아주 큰 공용 부엌이랑 공용 거실이 있었기에 밥을 해먹기도, 사람을 사귀기도 편리했다.
첫날은 짐을 풀고, 바로 다음 날, Lala의 친구가 일하고 있다는 Mark Twain 호텔로 갔다. 그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이 친구의 도움을 받으라고 소개를 해준 것이다. 정말 고마운 친구다. 그곳에 도착하여 Christine에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프런트 데스크 안쪽 방에 앉아 있던 지배인이 나오면서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힐튼헤드의 호텔에서 일하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어제 왔어요. 지금 직업을 구하는 중이에요”
내 얘기를 듣고는, 혹시 이력서가 있냐고 하길래 준비해 놓은 것을 전달했다. 그가 내 이력서를 물끄러미 보더니, 갑자기 내일부터 출근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ㅇ_ㅇ 친구 덕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일을 구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최고의 성공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무모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크 트웨인 호텔에서 일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KOTRA에 인턴십을 지원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대체 왜 그랬을까? ㅠ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만 있는 코트라에 친히 방문하여 그곳 담당자에게 이력서를 드리면서, 혹시 자리가 있으면 이곳에서 6개월간 근무를 하고 싶다고 했다.
여기서 떨어졌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내 운빨이 얼마나 좋은지, 코트라에도 떡 하니 붙어버렸다.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구나' 하며 좋아라 했는데, 사실 인생이 얼마나 복잡 오묘한 것인가.
코트라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현재 내 J-1 비자의 스폰서를 Comfort inn에서 코트라로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비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고, 그때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받았다.
"J-1 비자는 스폰서를 받은 곳에서만 일할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지금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면 비자를 취소할 수밖에 없어. 만약 미국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일주일 안으로 힐튼헤드로 돌아가서 예전 호텔에서 근무를 해야 해. 가능하겠니?"
그렇게 나는 다시 힐튼헤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달 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유롭게 생활을 했으니 반은 성공이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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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19개월 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2007년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나다움'이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특히 타국에서 온전하게 자립했던 경험을 통해, 그동안 나보다 타인(특히 엄마)의 행복에 가치를 두며 살아왔던 내가, 결국 인생의 주체는 남이 아닌 '나 자신'임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인생의 특별함과 별것 없을 동시에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무작정 해외에서 일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타국에서 홀로 일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모든 나라가 생각보다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과 세상에는 생각보다 심각하게 나쁜 일이 없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덧붙여서 가족이며 친구가 전혀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나를 특별하게 하는지, 또 존재하게 하는지를 체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온전한 내 인생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한국에서의 삶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 희망이 없는 삶, 기회가 없는 삶. 게다가 이런 최악의 상황에 나와 남을 비교하는 문화까지 있는 한국이다. 사실 그 어떤 20대의 성인군자가 온다한 들, 껍데기를 중시하고 남과 나를 대놓고 비교하는 한국은,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가 힘든 사회가 아닐까 싶다.
현재 무언가를 시도할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라면, 나 스스로를 좁은 곳에 가두고 괴로워하기보다는 '워킹홀리데이 도장 깨기'를 해보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한국 사회가 아닌, 아는 이 하나 없는 새로운 나라에 가서, 억눌렸던 나의 자아를 찾으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결국 나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월, 퀸즈타운을 여행하는 중에 공용 거실에서 30대 초반 이탈리아남, 20대 초반 프랑스남, 20대 중반 독일녀와 함께 2시간을 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프랑스남과 독일녀는 뉴질랜드가 첫 워킹홀리데이였던 반면, 이탈리아남은 영국, 아일랜드, 호주를 갔다가 뉴질랜드에 왔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행선지는 캐나다라고 했다. 여유와 자신감에 꽉 찬 그의 얼굴을 통해 반짝이는 젊음을 보았다. 그는 아마도 어디에서건, 어떤 상황에서건 남들보다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희망이 안 보일 때, 나를 몰아붙이는 용기가 때로는 필요하다. 영어를 잘 못해서 시도를 못하겠다면, 가까운 일본으로 가도 된다. 일본어는 한국어랑 비슷해서 2~3개월만 학원을 다녀도 대충 다 알아듣고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일본에서 해외생활의 요령을 터득한 후, 뉴질랜드/호주/캐나다/아일랜드/영국 등의 영어권 나라를 시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젊을 때 세상의 이곳저곳을 누비다 보면 결국 나의 정체성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단한 정체성은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힘을 길러줄 것이고, 또 이 힘은 남들보다 조금은 쉽게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한 번만 용기를 내보자. 실패해도 괜찮다. 그때는 돌아오면 되니까 걱정은 뒤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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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심자의 행운을 믿는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올 것이다. 비록 그 행운이 반드시 '성공'이나 '부(富)'로 이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얻는 색다른 경험과 나만의 철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방황하는 모든 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