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웠던 싱가포르, 그곳에서의 재회.'
미국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바로 취직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한번 더 방랑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싱가포르에서 한번 더 일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싱가포르는 참으로 특이한 나라다. 크기가 서울만한 나라, 비자를 받기가 쉬운 나라, 전 세계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 본사가 있는 나라, 여러 인종과 종교가 섞여 있는 나라, 영어가 공용어인 나라, 완벽한 인공미가 있는 나라, 쇼핑센터가 즐비한 나라, 1년 이상만 일하면 세금이 면제되는 나라 (2008년 기준이다.)
싱가포르를 선택한 이유는 아시아에서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의 삶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싱가포르에는 다국적 기업이 많기에 기회가 있을 거 같았고, 또 그때 당시 영어와 일본어를 높은 수준으로 잘하던 나였기에, 직업을 구하는 게 많이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미국에서 이미 취업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싱가포르에는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취업자들에게 직업을 연결해 주는 헤드헌팅 회사가 아주 많다. 때문에 내가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력서를 헤드헌팅 회사에 보낸 것이었다. 이력서를 보내고 하루, 이틀 뒤면 인터뷰가 잡힌다. 그럼 일정에 맞춰 회사를 방문한 후, 그곳의 컨설턴트들과 1차 인터뷰를 하면 된다. 컨설턴트들은 구직자의 언어능력과 경력/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후, 후보자에게 맞을 법한 직업을 지속적으로 소개해준다.
그렇게 헤드헌팅 회사로 면접을 보러 간 날, 나는 6명이 넘는 컨설턴트들과 인터뷰를 했다. 마지막에는 Biligual division의 Head였던 분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분이 인터뷰 말미에 자기들과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주셨다.
이왕 싱가포르까지 온 김에 다국적 기업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거창한 꿈을 품고 온 건 아니었고, 약 1년 반 정도 경험만 쌓기 위해 온 것이었기에, 회사의 네임밸류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헤드헌팅 회사가 나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그곳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
솔직히 말해서, 싱가포르는 나와는 결이 맞지 않는 곳이었다.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곳의 인공미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았고, 자로 잰 듯한 나무 사이의 간격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물욕이 없기에 곳곳에 위치한 쇼핑센터도 매력적이지 않았으며, 늘 친절했던 싱가포르 동료들도 마음을 드러내는 그런 솔직한 관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하우스메이트는 중국계 말레이시안이었는데, 너무나 잘 나가는 회계사였기에 집에서 함께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퇴근 후, 저녁밥을 해 먹고, 사는 곳 근처의 인공미가 넘치는 바닷가로 나가 걷는 것이 나의 유일한 루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회사-집-회사-집을 오가며 돈을 버는 것 이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기에 더 외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타국에서 온전한 내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나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결국, '나는 영원히 혼자겠지. 남자는 없을 거야. 결혼도 당연히 못할 거고.' 등과 같은 생각이 더 강해졌던 것 같다. 20대 후반의 여자라면 모호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강하게 엄습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냥 지나버린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고, 나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행동을 후회한다 해도 변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더 절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때였다. 내가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지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이메일이 선물처럼 온 것이다. 요하네스였다.
"나 인도네시아에 출장을 갈 일이 생겼는데, 너를 꼭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에 가기 전에 한국에 들를게.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인도네시아를 가는 김에 한국에 들른다고? 한국이랑 인도네시아는 비행기로 7시간이나 걸리는데?ㅎㅎ
그의 엉뚱함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이메일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그가 나를 보러 미국으로 온다는 것을 거절한 후부터, 지난 1년 반 동안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반가웠던 것 같다.
나는 바로 답메일을 보냈다.
"나 지금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어."
3분 뒤, 그로부터 답변이 왔다.
"싱가포르를 통해 인도네시아로 가는 티켓을 샀어. 싱가포르에서 2박 후 인도네시아에 갔다가, 일주일 후 다시 싱가포르에 와서 3일을 더 있을 거야. 도착 날짜랑 시간은 이거야. 공항에 꼭 나와주면 좋겠다."
.....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솔직히 두근거리는 마음보다는,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그리고 무채색의 단조로운 일상에 무지갯빛 색채가 입혀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신나는 기분으로 창이국제공항에 그를 만나러 갔다. 솔직히 멕시코에서의 만남은 꽤 지난 일이라 그때의 추억은 이미 아스라이 바래져 있었고, 지난 1년 반 동안 거의 연락을 안 했기에, 그에 대한 기대감도 전혀 없었다. 또한, 멕시코에서 느꼈던 그에 대한 호감은, 사람 자체보다는 그곳의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을 했기에, 공항에서 그를 기다릴 때 설렘이 전혀 없었다.
창이공항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찾는 모습을 밖에서 볼 수가 있다. 무료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짐을 찾기 위해 요하네스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도 나를 보더니, 슬며시 다가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두근두근'
그를 보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멕시코에서 느꼈던 호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오하까에서 멕시코시티로 올라오는 버스에서, 유리드와 로버트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면서 둘이 나누던 대화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쟤네들은 왜 결혼을 안 해? 나는 꼭 할 거야. 그래서 아프리카는 미래의 남편이랑 갈 거야."
"나도. 나도 결혼은 꼭 할 거야."
그 순간, 왜 뜬금없이 이 장면이 떠올랐을까. '이 남자가 진짜 내 미래의 남편이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