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되는 한국에서의 삶, 그리고 이별'
독일에서 돌아와 한국에 귀국하기 전까지, 4일간 싱가포르에 있었다. 그 기간 동안에 그의 전화를 받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의 이메일에도 답변을 하지 않았다. 헤어짐을 말하기에는 나의 몸과 마음이 편안한 내 나라에서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1년 반을 지낸 싱가포르였지만, 귀국을 위해 챙길 짐은 많지 않았다.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나니, 이민 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반면, 그곳에서의 시간과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세상에 가치 없는 경험은 없다는 생각을 늘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찮아 보일지라도, 지금의 경험이 내 인생을 코너로 몰아 설 자리를 없애는 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서 배운 바가 있고, 또 이 경험을 언젠가는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면, 미국에 가기 전에 나는 5성 호텔의 예약실에서 근무를 했었다. 그때 창문도 없는 예약실에서, 하루에 몇 천통씩 전화만 받으며 1년을 살았었다. 과연 이렇게 받는 전화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며 다녔었는데 웬일인가. 세상을 살다 보니 어느 회사를 가든, 어느 나라에서 일하든, 일의 80%는 모두 '전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바빠서 숨 쉴 틈도 없었던 예약실에서, 전화받는 예절과 목소리 톤을 몸으로 익힌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전화를 받거나 거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전혀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게 나만의 큰 장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어떤 진상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내성도 큰 몫을 했고 말이다.
미국의 호텔 프런트에서 울리는 전화도 무섭지 않았고, 샌프란시스코에 잠깐 있을 때 구글로 서치를 해서 무작정 관련 회사에 전화를 걸어 광고를 해야 하는 Cold Call을 할 때도 있었는데, 그때조차 1도 떨리지 않았다.
예약실에서 근무하면서 얼마나 많은 진상을 만났던가. 욕 하는 인간, 소리치는 인간, 비아냥 거리는 인간. 나의 자존감을 팍팍 깎아먹던 그 인간들과의 경험이 내 인생에 이리 큰 도움이 될 줄이야.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들이 나를 트레이닝 시켜준 은인이었던 셈이다. 진짜 세상은 요지경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그 무슨 경험일지라도 나쁜 경험은 없다. 설사 범죄와 연관된 나쁜 경험이었다 하더라도, 그 어둠 안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에서 배움을 찾으며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첫사랑과의 헤어짐 때문에 괴로운가? 회사 일로 내 자존심이 깎여서 살기 싫은가? 사랑하는 가족이 하늘나라로 가서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겠는가? 투자 실패로 내 인생의 끝자락에 와있는 느낌이 드는가? 여행 중에 여권을 도둑맞아서 걱정이 태산인가? 걱정 말길. 지금의 문제는 반드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고, 이 모든 경험은 결국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묘미"라 할 수 있다.
...
싱가포르에서 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난 후, 드디어 귀국을 했다. 하나뿐인 외동딸의 방랑을 지켜보기만 했던 부모님은 이제 한시름 놓은 듯했다. 나 또한, 방랑은 해볼 만큼 해봤으니 미련이나 후회가 하나도 없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요하네스에게 이메일을 쓰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2주 좀 넘게 너와 함께 했던 순간은 좋았지만, 우리의 미래를 꿈꿀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어. 그 이유는... 그러므로 우리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만 헤어지자.'
최대한 감정을 빼고, 담담하게 작성해서 보냈다.
...
이메일을 보낸 후 부모님이랑 가장 먹고 싶었던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해외 어디를 가든지 왜 이리 순댓국이 먹고 싶은지 모르겠다. 지금도 너무 땡겨ㅜ 이야기 꽃을 피우며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순댓국을 우걱우걱 먹으며, 눈물도 질질 흘리면서 엄마 아빠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금 요하네스가 내 메일을 읽고 있나 봐.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네. 나는 사랑이 핑크빛일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회색빛이 되어버렸어. 마음이 너무 아파."
그날 새벽 2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요하네스입니다. Let me talk with Hanna"
"한나 지금 자요."
"Let me talk with Hanna"
"한나가 받기 싫다고 하네요."
"Let me talk with Hanna"
영어로 계속 말하는 그와 한국어로 대답하는 엄마. 그는 나와의 통화를 한참 시도하다가, 결국 안된다는 것을 안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도 몇 번 더 전화가 왔다.
'솔직히 이 상황에 전화를 받아서 무슨 말을 하겠어. 이미 끝났는데.'
미련을 가져봐야 서로 힘들 뿐, 이득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미 알았다. 나란 인간은 사랑에만 뛰어들기에는 생각과 감정이 너무 많은 초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