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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벽의 끝, 결혼 (21)

'내 나이 서른, 한국으로의 귀국'

by 한나Kim

3박 4일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한 카약투어는 공허함과 두려움만 남긴 채 끝이 났다. 많은 기대로 시작된 여행이었기에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안겼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소피에게 던진 추파(?)도, 나를 대하던 차가운 태도도 나름 넓은 마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감정을 공감하기보다는 그의 감정을 강요하는 듯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를 가진 남자라면 내가 혹시 그와 결혼해 독일에서 살게 됐을 때, 나의 외로움을 외면할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을 그에게 걸기에는 미래가 너무 암담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이 외에도 소소한 몇 개의 이유가 더 있었다. 그가 싱가포르에 왔을 때, 우리 데이트 비용의 70프로는 내가 썼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직장인이었고, 그는 연구원이었기에 버는 돈 자체가 내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게 나의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을 했다.


반면 그는 독일에서 어땠는가. 액티비티나 투어 비용을 정확히 반반으로 나누는 것은 당연하나, 물 하나를 사 먹을 때조차 네 것과 내 것이 나뉘어 있었다. 덧붙여 카약 투어에서 미리 돈을 걷었었는데, 투어가 끝나고도 비용이 꽤 많이 남았음에도 그것을 정산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이런 나를 쪼잔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돈과 관련해서는 뭐든지 정확한 걸 좋아하는 나이기에 그의 이런 불명확한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랄까, 어떤 면에서는 칼 같이 나누고, 또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에게 아량을 베푸는 '부정확함'이 불편했달까.


요하네스와 결혼 후에도, 이런 독일 문화가 나를 힘들게 했다. 주는 것은 쏙쏙 받으면서, 자기들은 아이스크림도 하나 안 사는 문화. 설령 그게 그들의 문화라 할지라도, 4~5번을 받으면 적어도 1번은 나도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나, 인간이라면 말이다. 나로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나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때 시댁은 마니또를 뽑아 서로에게 선물을 한다. 물론 독일에 있는 그들은 다 같이 모여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지만, 우리는 한국에 있으므로 선물만 교환했다.

처음 결혼 후 5년간은 마니또에게 선물을 보낼 때, 내 비밀친구뿐 아니라 모든 조카들의 선물도 챙겨 보냈다. 예쁜 옷, 에디슨 젓가락, 누빔 내복, 나전칠기 거울, 한국 과자 등, 아주 소소하지만 나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들이었다. 물론 무엇을 바라고 보낸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5년간, 크리스마스마다 조카들의 선물을 챙겨준 후, 둥이가 5살이 되어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독일의 크리스마스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역시도, 한국에서 모든 조카들의 선물을 준비해서 갔는데, 우리의 '첫' 크리스마스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둥이의 선물을 챙겨 온 가족이 단 한 명도 없었다ㅜ


엄청난 쇼크였다.

이런 비슷한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독일의 차가운 문화에 점점 정이 떨어지며 이제는 나도 독일에서는 나누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라 할 수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는 진정한 환대의 민족, 정이 넘치는 민족이 아니던가. 나의 수많은 외국 친구들이 한국에 놀러 왔을 때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대했다. 맛있는 삼겹살이나 한정식을 쏘는 건 기본이요, 그들을 한강 공원에 데려가 짜장면도 시켜주며 배달 오토바이가 우리를 어찌 찾는지도 보여줬던 사람이다. 이렇게 환대하는 마음으로 그가 싱가포르에 왔을 때 비용도 많이 냈고, 또 그의 장단에 맞춰주다가 이까지 흔들렸던 것이다.


근데 그랬던 나를 이렇게 대한다고? 아무리 문화 차이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순진한 태도가 그를 향한 기대치를 높인 것이기에 원인은 나에게도 있었다.


모든 인간관계 문제의 원인은 기대치로 시작되는 것 같다. 서로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상처조차 없을 텐데. 왜 나란 인간은 자꾸만 어리석게도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일까.


...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인사를 했다. 물론 인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에게 나의 결심은 말하지 않았고, 또 그렇다는 느낌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어차피 헤어질 거, 몸이 멀어졌을 때 안녕을 고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싱가포르로 들어갔고, 4일간 지난 1년 반 동안 살던 그곳의 짐을 정리한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일본, 영국, 미국, 싱가포르 등을 돌아다니던 20대의 방랑이 비로소 끝난 것이다.


그때 내 나이가 한국나이로 딱 서른이었다. 그리고 8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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