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친구들과 함께한 3박 4일간의 카약 투어'
독일 계절의 꽃은 여름이다. 한국의 가을이랑 비슷한 날씨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16~18도 정도이고 한낮은 26~30도 정도. 아주 더우면 32도까지 오르지만, 습기가 거의 없는 건조한 더위라 그늘 밑에만 가면 시원하다. 독일의 여름 하늘은 우리나라 가을처럼 높고 푸르며, 비도 거의 안 온다. 때문에 습기에 엄청나게 취약한 요하네스는 여름에는 늘 독일로 피서를 간다. 아마도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는 내년 여름에도 우리 가족은 독일에 갈 것이다.
...
바야흐로 2009년 7월도 이러했다. 하나둘씩 요하네스 집으로 모여드는 친구들의 분위기도 좋았고, 따뜻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 그리고 높고 푸른 하늘. 거의 모든 게 완벽했다.
3박 4일간의 카약 투어를 나는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현 시아버지께서 구워주는 바비큐도 맛있었고, 그때 곁들인 독일 맥주도 끝내줬으며,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는 그의 친구들도 모두, 모두 다 좋았다.
다음 날, 요하네스 집 근처에 카약을 빌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총 13명이 함께 했다. 2인 1조로 짝을 지어 카약을 빌린 후, 바로 그 카약을 타고 노를 저으며 호수와 호수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근처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작은 식당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고 다시 이동.
유유자적하게 카약과 한 몸이 되어 물 위를 다니다, 어스름해지기 전 즈음, 예약해 놓은 캠핑장으로 가서 그곳에 텐트를 치고 다 같이 저녁을 해 먹고 밤에 담소를 나누며 놀다가 자는 게 카약 투어의 일과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또다시 카약을 타고 돌아다니면 된다. 은근히 힘들지만 또 은근히 재미있는, 굉장히 자연 친화적인 투어라고 할 수 있다.
2인 1조 카약을 타고 물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정글 같이 우거진 숲을 지나기도 하고, 카약 한 개만 지날 수 있는 좁은 수로 같은 곳을 지나기도 하며, 또 큰 호수를 지날 때면 나무 하나 없는 땡볕을 지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호수와 호수가 연결이 안 된 곳은 카약을 들고 이동을 해야 한다. 물 밖에서의 이동은 사실 엄청 고생스럽긴 하다. 근데 고생이 없으면 또 캠핑이 아니지 않은가 ㅎ.
이번 투어에는 멕시코를 같이 여행했던 유리드와 로버트 커플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임신 7개월 차로 배가 엄청 나와있었는데도 노를 어찌나 잘 젓는지. 심지어 육지로 이동할 때 혼자서 그 무거운 카약을 끌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첫날밤에 저녁을 하는 팀을 빼고 비번인 친구들끼리 캠핑장의 모래사장에 설치된 네트에서 다 같이 배구를 했는데, 큰 배를 가진 그녀가 배구 또한 필사적으로 잘하는 것을 보면서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바닥을 뒹구르며 공을 사수하던 그녀. 반면, 멀쩡한 몸으로도 공 하나 사수하지 못하는 나 ㅠ
신나게 배구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다 같이 이동할 때였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의지하고픈 사람은 당연히 요하네스가 아닌가. 나는 당연히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때 이눔시키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너 말고도 챙겨야 할 사람들이 많아! 내 손 잡지 마."
What?ㅇ_ㅇ
나 너 보려고 싱가포르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런 액션도 취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독일 문화가 그렇다고 하는데 받아들여야지 뭐.
맛있게 저녁을 먹은 후, 장작을 피워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역시나 살포시 요하네스 옆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그가 "독일은 커플끼리 앉지 않아!!!"라는 어이없는 말을 시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비로소 엄청난 분노가 올라왔다.
'내가 잡힌 물고기라 이건가? 웃기고 있어 진짜. 나도 너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난 어차피 혼자 여행했던 사람이고, 혼자여도 늘 즐거웠으니까.'라고 노선을 변경했다. 그에게 비굴하게 살살거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그가 왜 그랬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때 무리 중에 '소피'라고 하는 나와 동갑인 여인이 있었는데, 딱 보아하니 이 시키가 그녀를 약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아주 나쁜 놈이 아닐 수 없다!
나랑 요하네스는 앞뒤로 2인용 카약을 탔었는데, 그가 나와 얘기하기는커녕, 1인용 카약을 타고 있는 소피만 쫓으며 계속 그녀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뿐이 아니다. 카약에서 내려서 내가 아닌 그녀에게 먼저 가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는 멍멍이 같은 짓도 한 것이다.
이 놈이 진짜 미쳤구나. 나를 아주 호구로 보고 있네. 나의 깊은 빡침이 느껴지는가. 이 상황이 딱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안 그래도 분노 폭발하기 1분 전인 나에게, 그가 소피와 즐겁게 떠든 후, 급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소피는 이제 남자 친구가 없대. 얼마 전에 헤어졌대!"
저 말을 듣고, 내가 느끼던 상황이 상상이 아닌 진실이었을 알고, 분노를 넘어 갑자기 '고요한 냉정함'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이시키에게 똑같은 걸 경험하게 하고 차 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한국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눈이 내린다 했거늘!
카약 무리 중에 싱글이었던 남자가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나랑 동갑, 다른 한 명은 4살이 많았다. 둘 다 좋은 직장에, 멀쩡하게 잘생기고 성격도 좋았기에 왜 이들이 싱글일까 싶었던 친구들이다.
대충 감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내가 가져간 보드게임으로 그 2명의 싱글 훈남들이랑 희희낙락 열정적으로 놀기 시작했다. 더 즐겁게 더 오버해서, 그리고 간간히 어깨도 두드려주고 팔도 만지고 해 가며 말이다. 그게 눈에 거슬렸는지 나랑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요하네스가 어디선가 나타나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웃기고 있다. 솜털처럼 가벼운 시키가.
2시간 정도 놀았을까? 갑자기 그를 도발하기 위해 싱글남들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면서 현타가 왔다. '너희들을 오해하게 하면 안 되겠지.'라는 뜬금없는(?) 마음이 든 것이다. 철벽녀의 마음이 이렇다. 갸들은 1도 관심이 없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도 침 ;;
하여 다음 타깃은 유부남 로버트로 바꾸었다. 그의 아내 유리드는 여전사에,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여자이기에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훈남 2명과 즐거운 보드게임을 마친 후, 로버트와 호수에 들어가 다시 즐겁게 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기는 무시하고 자기 친구들이랑만 신나게 노는 나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그가 다시 나에게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 쳇 웃기는 놈일세
알게 뭐람을 시전 하며 1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랬더니 뜬금없이 나에게 눈물을 보이며 읍소하는 것이다. 자기랑 잠깐 숲에 가서 이야기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남자의 눈물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의 말을 들어는 볼까 싶어 숲으로 갔더니만 그가 황당하게도 "왜 나를 무시하고 유부남 로버트랑만 노니?"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덧붙여 그는 "유부남이면서 남의 여자 친구랑 뭐 하는 짓이냐"며 그를 욕하기 시작한다.
이 쉐끼가 지금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도 용서를 해줄까 말까인데, 유부남 로버트를 욕해? 니가 한 짓으로, 내가 이렇게 놀고 있는 건데 지탓은 안 하고 남 탓을 한다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와 그에게 샤우팅을 시작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너가 했던 짓을 생각해. 내가 왜 그랬겠어!!?? 너 소피 좋아하지? 내가 걔 남친이랑 헤어진 걸 왜 알아야 하는데 이 시키야!!!"
참고로 독일인은 싸울 때, 조분조분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소리를 지르거나 감정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나의 쌩목 샤우팅에 너무나 당황한 그는, 나를 더욱더 깊은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주위 사람들이 다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나를 우습게 봐도 상관없다. 나는 지금 현재의 내 감정이 가장 중요하니까. 이 시키야! 독일 문화 어쩌고 저쩌고 얘기하며 나를 내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너 따위 필요 없다. 얼마 전에 남친이랑 헤어진 소피랑 사귀랏!!! 등등 분노조절 장애인처럼 멍멍이 지랄을 계속 시전 했더랬다. ㅋ
그랬더니 그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 자기는 그런 게 아니라며, 이제부터 너만 보겠다고, 한국 문화가 이렇다는 것을 몰랐다, 미안하다 어쩌다... 난리가 났다.
너랑은 무조건 끝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내가 약간 변태끼가 있는 건지 엉엉 우는 그를 보니 당황스러움과 함께 마음에 급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이 누나가 한 번 용서해 주마. 앞으로 조심해. 한번 더 이러면 그때는 진짜 뒤도 안 보고 떠날 거야."
내가 언제든 떠날 수 있음을 느꼈는지 그 후로 그는 소피는 본 척 만 척하며 나에게만 집중했다. 덧붙여 13명 중 나 하나만 있는 듯 급 선회하는 행동을 했는데, 솔직히 그가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후, 나 또한 유부남 로버트와 그의 싱글 친구들과 즐겁게, 그렇지만 선을 넘지 않는 정도로 지냈다.
...
이후에 평화가 찾아올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뭔가 마음이 공허하고 외로웠다. 모두들 나를 배려해 영어로 이야기했고, 게임도 하고 수영도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이들은 내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랐다. 다시 말하면 여행지에서는 모두가 이방인이지만, 지금 나는 독일이란 나라에, 독일인들 틈에 나 혼자 덜렁 이방인으로 들어온 것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도 아름다웠고, 넓디넓게 펼쳐진 숲도 예뻤으며 조용하고 고요한 호수도 마음에 들었다. 또 밤이 되면 차가워지는 공기도 좋았다. 하지만 이 크고 아름다운 숲 속에 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짧은 3박 4일에 말이다.
마지막 밤, 이들 사이에서 즐거운 척 웃고 있는 내 모습이 피곤해 혼자 슬며시 일어나 텐트에 들어와 있었다. 아 혼자 있는 이곳이 천국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참 있다가 요하네스가 들어왔다. 그리고 굉장히 행복하고 상기된 모습으로 그가 내 얼굴을 잡고 물었다.
"Are you happy?"
이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는 나에게 그가 다시 한번 얘기했다.
"You must be happy because I'm so happy to be with you."
이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처음 경험해 본 이 공허한 감정을 추스리기도 전에 불쑥, "너도 행복할 거야 왜냐면 내가 행복하니까"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
글쎄, 잔인하다 외에는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나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느낌.
내가 행복하니, 너도 행복할 거야
...
그때 문득, 그와의 미래는 지금처럼 외롭고 공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어쩌면 그와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짧은 순간 참 많은 감정이 오갔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내 관찰에서 그가 탈락한 것이 아닌, 내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음에 그를 놓아버린 것이다. 물론 그의 가벼움도 한몫을 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