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 안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들'
책의 제목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빌리게 되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밝게 터지는 불꽃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불행한 사람이 조금은 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책은 필시 따뜻할 거라는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책의 스토리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우리 삶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는 곳에 따른 계급과 지위, 주거공간에 따른 경제적인 부담'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요즘 집값이 다시 고공행진을 시작할 때 선택한 책이 하필 '집을 중심으로 구성된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아무튼 나의 뽑기 실력(육감)은 여전하다.
이 책은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소설이 전혀 연관이 없는 별개의 스토리이지만, '집 또는 주거공간'을 중심으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 그곳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그곳을 떠나고 싶은 사람, 그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 그곳 때문에 실패한 사람,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 그곳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 등이 나오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
<미애>
이혼 후, 6살 딸 해민과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애는 친구의 임대아파트에서 3개월을 거주할 수 있게 되면서 그녀의 딸 해민과 아파트 커뮤니티의 독서모임에 참가한다. 그곳에서 자신과는 처지가 다른 '교양 있고 선한 인품'을 가진 선우를 만나게 된다. 감사하게도 선우는 미애가 일을 구하러 갈 때 해민을 돌봐주는 등, 미애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던 어느 날 해민이와 그녀의 아이가 잠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애는 그녀로부터 매몰차게 단절됨을 경험한다.
P17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질문은 대체로 답이 정해져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고, 아이들이 하는 대답도 옳고 바르고 선한 가치들에 둘러싸여 있어 숨이 막히긴 매한가지였다.
지금 당장은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거든요. 결국 우리 애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잖아요. 지금이라도 우리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죠.
그래서 누군가 확신에 찬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정색하고 반박하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당장 몇 달 뒤 이사할 집도 구하지 못했으며, 몇 년 뒤에 학부모가 될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문제가 닥쳐올지 알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북극곰과 플라스틱 조각을 삼키는 고래까지 걱정해야 하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거였다.
<20세기 아이>
세미는 지난봄에 외할아버지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에 엄마와 언니와 함께 들어왔다. 외할아버지 집은 물이 새고 보일러가 고장이 났는데도, 곧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기에 집주인은 고쳐주지 않는다. 세미는 새로운 주인이 이 집을 구입하면 여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마침, 지난주에 집을 사려고 왔던 사람이 다시 세미네 집을 방문한다.
P58
세미는 여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여자가 입은 코트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여자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가 세미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아니, 그런 것보다 세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여자의 표정이었다. 여자의 얼굴엔 뭔가 터져 나올 듯한 조마조마한 느낌이 없었다. 엄마와 언니, 할아버지를 마주할 때마다 느껴야 했던 불안의 조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P61
만약에 사면요. 아줌마랑 언니랑 이 집으로 이사 와요?
아니, 여기서 우리가 사는 건 아니고, 그냥 사두는 거야.
왜요? 여기 와서 살면 동백나무도 매일 볼 수 있잖아요.
여자는 대답 대신 조수석에서 쿠키 하나를 꺼내 주었다.
세미라고 했니? 네 덕분에 이 집이 아주 환하구나.
그 순간 세미는 투명한 포장지에 담긴 구름 모양 쿠키를 절대로 뜯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여자가 자신에게 해준 그 말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목화맨션>
없는 돈을 빚내 구입한 주택의 재개발이 계속해서 미뤄지면서 점점 더 고민이 커지는 집주인 만옥, 그리고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순미는 여러 번 임대차 계약을 하면서 서로의 삶과 사정을 알게 되며 힘들 때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다 만옥의 남편 건강이 점점 악화되면서, 그녀의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자, 결국 만옥은 주택을 팔기로 결정하고 순미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한다. 그녀의 상황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던 순미가 계약 기간까지 살겠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맞서면서 그녀의 마음이 혼란스럽다.
P100
언니, 집을 팔려고?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지금껏 기다린 거 아깝지도 않아?
처음에 순미는 만옥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옥이 이미 집을 내놓았고, 집을 사겠다는 사람과 구체적인 조건을 의논한 사실까지 알고 나서는 계약 기간까지 살겠다고 말을 바꿨다. 집을 사겠다는 사람과 통화하겠다고 말했고,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럴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만옥도 계속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남터미널>
주인공은 달동네를 돌아다니며 겨우 빌라의 주인이 되었다가 지금은 오피스텔의 주인이 된 여성이다. 그녀가 오피스텔에 투자한 건 근처에 터미널이 있기 때문인데, 여론이 이 터미널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해서 매우 골치가 아프다. 게다가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세입자가 월세를 밀리고 연락이 두절되어 마음이 불편한 상태. 하필 이럴 때 그녀는 20년 전 주택조합에서 만나서 같이 빌라를 보러 다녔던 홍 사장의 장례식장에 방문하게 된다.
P113
홍 사장은 느릿느릿 말하는 편이었다. 늘 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며 입을 열었고, 말을 마친 뒤에는 버릇처럼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에겐 주택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홍 사장의 만류로 몇 차례 매매 계약을 보류했고, 그게 정말 잘한 선택이라는 것을 실감한 뒤부터 그녀는 홍 사장이 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P117
장건호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오늘 내가 따지러 온 게 아니에요.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일 다 있는 거지. 내가 그걸 모르겠어요? 그래도 최소한 사정은 설명을 해줘야지. 말도 안 하고 사람을 이렇게 피해 다니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안 그래요?
P122
왜 홍 사장이 그 주택 사고 나서 마음고생이 심했다잖아요.
아니, 그거 팔라는 사람이 있었다면서요? 사고 싶다고. 그때 왜 안 팔았대? 남의 일은 컴퓨터처럼 딱딱 잘 맞히는 양반이 뭐 좋은 집이라고 그걸 그렇게 쥐고 있었대요?
왜 그 동네, 매립장 나간 부지에 테마파크 들어온다고 말 많았잖아요. 그거 기다렸던 거지 뭐. 테마파크 무산되고는 대형 병원 들어온다고 했다가 그것도 흐지부지 되고. 몇십 년째 버려져 있는 땅을 누가 개발하겠다 나서겠냐고요. 가망 없지. 이제 죽은 동네예요 거기.
이 일이 그렇습니다. 경험 많은 홍 사장도 이렇게 되는 걸 보면 참 한순간이다 싶어요. 한번 타이망을 놓치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니까요.
<산무동 320-1번지>
호수 엄마는 여러 건물을 소유한 장 선생을 대신해 그의 임대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녀 또한 그의 세입자이나, 그의 건물을 관리해 준다는 명목 하에 아주 저렴하게 살고 있다. 그녀는 세입자들에게 밀린 월세를 받으러 다니면서도, 잔인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동네가 재개발이 안되고 있는 덕분에 그곳에서 저렴하게 머물며 노후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P147
어느 날, 장 선생이 402호의 밀린 월세를 대신 받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일주일 만에 밀린 월세 두 달 치를 받아냈다.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여서 가능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일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이후 대리인이라는 호칭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자신감이 붙고 점점 노련해졌다.
명진빌라, 새한빌라, 영시티, 단독주택 한 채와 2층 주택까지. 그들 부부가 산무동에서 관리한 장 선생의 건물은 다섯 채였다.
P153
그녀가 하는 일은 입장이 상반된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거나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서 있는 것이었다. 장 선생과 세입자들은 그녀를 통해서만 말하고 들을 수 있었다. 양쪽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그녀의 일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쪽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P169
여기 싹 철거되고 아파트 들어서면 우리가 할 일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 돈 있는 사람들 세 주고 나면 월세 받으러 다닐 일도 없지. 여러 말할 거 없어요. 재개발 안 되는 게 우리한텐 고마운 일이야. 아닌 말로 재민 엄마 당장 나가겠다고 하면 세입자를 또 무슨 수로 구해요.
<자전거와 세계>
주인공인 현지는 치과에서 일하면서, 동료인 정민과 친하게 지낸다. 둘 다 비슷한 평수의 원룸에서 홀로 자취를 하고,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옮기고픈 바람과 목표가 같기에 쉽게 친해졌다. 잘 지내던 어느 날, 현지는 정민으로부터 자신은 치위생사이고 너는 단순 알바이기에 우리는 엄연히 다르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프다. 또한,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할머니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현지는,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할머니가 결국 보상금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그녀는 할머니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괴로워하면서도 할머니가 준 보상금을 받는다.
P201
그녀는 그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합의금을 받으려고 다른 사람을 속인 할머니,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정민, 위로 대신 묘하게 질책을 가하는 팀장까지. 그녀는 그들 모두를 이해할 수가 없다. 순식간에 그녀의 마음이 원망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에게 봉투를 돌려주고, 이런 부정한 돈은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아니, 할머니가 아니라 그 운전사에게 이 돈을 돌려줘야겠다고 결심한다. 그것만이 이일을 바로잡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
P204
며칠 뒤면 그녀의 생일이다.
이번 생일이 지나면 그녀는 서른이 된다.
<사랑하는 미래>
주인은 특별한 날도 늘 집에서 머무르며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회사 동료로부터 좋은 시절을 집에서만 보내면 나중에는 후회하게 되니 젊을 때 이거저거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갈 수 있는 덴 다 가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첫날, 언어 교환 모임에 나가게 된다. 그곳에서 혼혈인 마크를 만나 사랑에 빠진 후, 마크가 그녀의 집에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P227
그녀의 퇴근길 풍경은 달라진다. 더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붐비는 지하철 여러 대를 그냥 보내버리지 않는다. 정신없이 졸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는 실수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기민하게 움직인다. 단 1분이라도 일찍 귀가하기 위해 집중력과 순발력을 발휘한다. 멀리 집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녀를 채근하던 조바심이 기대감으로 바뀐다.
P231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기획 전시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전시관은 연일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두운 전시관에서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제지하느라, 전시가 허접하다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달래느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감시하느라 그녀는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늘고, 신경이 점점 더 곤두선다. 퇴근 무렵에 그녀는 녹초가 된다.
그녀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를 서성이기 시작한다. 마트를 지나고 인적이 드문 놀이터를 배회하다가 버스 정류장까지 간다. 그런 후엔 한산한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마크와 대화를 나눌 기운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한 힘도, 핑크빛 전망 속에서 미래를 낙관할 자신도 없다.
<축복을 비는 마음>
인선은 양 사장의 청소업체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성실하게 시키지 않은 곳까지 청소를 하면서, 이렇게 일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같이 일하게 된 경옥이, 추가 수당을 받으면서 부탁하지 않은 곳까지 청소를 해주는 것이냐고 그녀에게 물어본다. 추가수당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기에 인선은 경옥이 까탈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하는 말이 옳다고 느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P250
근데 이 일에 정말 소질 있으신 거 같아요. 지난번에 저 완전 깜짝 놀랐잖아요. 돈만 많으면 저희 집 청소도 맡기고 싶었다니까요. 그 집주인은 진짜 절이라도 해야 해요. 그렇게 청소해 주는 사람이 어딨어요. 전문가라는 사람들 저도 많이 봤거든요? 근데 그렇게 청소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진짜 처음 봤어요.
다들 그렇게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가 일을 주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려 했지만 인선은 잠자코 거품 물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민망하기도 했는데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
양 사장의 아내가 자리를 비운 탓에 인선이 주방 후드와 가스레인지 작업까지 마무리해야 했지만, 여느 때처럼 울분이 치밀지도 않았다.
그것이 경옥이 건넨 말 때문이란 것을 인선은 나중에 알았다. 지금껏 들어본 적 없고, 듣게 될 거라고 기대히지 않았던 그 말을 자신이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한 번쯤 그런 말을 해주길 몹시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누구도 그런 다정한 말을 건넨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거였다.
P270
저도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경옥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집을 청소할 땐 마음이 너무 불행해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받는 돈은 똑같은데 몇 배나 더 일해야 하는 상황이 억울하지 않으냐는 거였다.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뭐.
축복요? 무슨 축복요?
깨끗하게 청소해 드리는 만큼 좋은 일 많이 생기시라고 빌어주는 거죠.
경옥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인선을 돌아보았다. 인선의 얼굴에 엷게 웃음이 떠오르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경욱이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진짜 아니죠?
왜 아니에요? 진짜지. 진짜예요.
...
누군가는 집 때문에 웃고, 누군가는 집 때문에 운다. 누군가는 집 때문에 돈을 벌고, 누군가는 집 때문에 망한다. 예전에도 그래왔고, 여전히 그러하다. 집이라고 하면 느껴지는 안락함과 편안함이 어느새 사회의 계층과 지위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집을 청소하면서, 마음이 불행해지기보다는 깨끗하게 청소해 주는 만큼 좋은 일이 많이 생기라고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 인선을 바라보며, 그녀의 앞날에 절망이 아닌, 희망이 가득하기를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