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증오, 진실과 거짓, 오해로 이루어진 삶'
이정명 작가의 책이기에 읽고 싶었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른 채, '부서진 여름'이라는 책 제목과 작가의 이름에 끌려 빌렸다.
...
책은 성공한 화가 '이한조'의 삶으로 시작된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칭송받는 화가. 그의 옆에는 그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만들어 결국에는 성공을 시킨 아내, '수진'이 있다. 한조가 성공의 정상 위에서 삶의 안락함을 즐기던 어느 날, 아무런 말 없이 '나에 관한 너의 거짓말'이란 그녀의 자작 소설만 그에게 남겨놓은 채, 수진이 사라져 버린다. 한조는 그녀가 작성한 소설을 읽으며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의 과거를 마주한다.
P9
그 도시 사람들은 그를 잘 알았다. 산책길에서 그를 알아본 노인들은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아이와 산책 나온 젊은 부모들은 저기 지나가는 아저씨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나직하게 얘기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아이들이 되물으면 부모들은 그가 쐐기화로 유명한 화가 이한조라고 대답했다.
P11
그는 식어가는 햇살 속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획득한 지위, 그가 이룬 업적, 그가 확보한 영향력. 아내가 물었다.
"무슨 생각해?"
"지금, 이곳이 완벽한 순간과 장소라는 생각. 이 순간이 우리에게 속해 있고 우리가 이 공간에 속해 있어. 완벽한 하루야."
P15
"여보! 어디 있어, 여보?"
집 안은 호텔방처럼 단정했고 구석구석 청결했다.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양말짝도 대충 던져둔 점퍼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거울에는 얼룩 한 점 없고 선반에는 정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개킨 하늘색 수건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주방 싱크대는 물기 한 방울 없이 깨끗했다.
P20
스탠드를 켜자 동그란 불빛이 서류봉투를 비추었다. 봉투는 봉해지지 않은 상태였고 겉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 두툼한 A4용지에는 제목으로 보이는 푸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에 관한 너의 거짓말.' 낯익은 필체였다. 언젠가 그에 대한 글을 쓰겠다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수진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왜 인생의 최절정기에 그로부터 사라졌을까. 책은 종 잡을 수 없는 이야기로 시작되어 마지막까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
25년 전 여름, 하워드 주택의 집사로 살던 한조의 아버지, 그의 형 '수인', 그의 엄마 그리고 한조는 집주인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한조는 집주인의 첫째 딸인 '지수'를 흠모하며 그녀를 배경으로 매일 그림을 그렸고, 공부를 잘했던 수인은 지수와 그의 동생 한조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무탈하게 지내던 어느 날, 지수가 실종이 된다. 그리고 그녀가 주검이 되어 나타난다.
P64
"지금 서로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경사님! 찾았나요? 우리 지수 찾았어요?"
"네. 그렇습니다."
윤산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뻣뻣이 서서 남보라를 바라보았다. 지수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댐에서 2Km 남짓 떨어진 보림천 가운데였다. 갈수기라 방류량을 줄이자 평소 1.5m가 넘던 수심이 얕아졌고 상류에서 흘러오다 바닥 돌에 걸린 사체 일부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지수는 왜 죽었을까. 누가 지수를 죽였을까.
지수의 실종이 살인사건으로 바뀌며 모든 의심이 한조네 가족에게로 향한다. 집사인 아버지와 수인 그리고 한조. 그녀가 실종된 당일, 3명 모두 의심스러운 상황이 있었다. 지수와 인사를 했던 아버지, 그녀와 함께 있으며 그녀를 그렸던 한조, 당일 밤늦게 집에 돌아온 수인.
수인은 한조에게 둘이서 수학 공부를 했다고 알리바이를 만들자며 입을 맞춘다. 수인이 그날 밤늦게 돌아온 것을 본 엄마는 그의 옷을 빨고 또 빨았다. 한조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지수와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는 모두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자백한 후 감옥에 간다.
P81
"널 본 사람이 없으면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아. 그런데도 거기에 너 혼자였다는 말이 사실이야?"
한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형이 거짓말을 알아챈 것일까? 그는 화실에 혼자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수인은 갈고리처럼 그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정신 좀 차려. 넌 거기 혼자 있지 않았잖아. 누구랑 있었는지 말해!"
침착하고 차분한 눈, 사실을 털어놓고 싶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지수라고 대답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한조에게 수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랑 함께 있었잖아."
P87
깨끗이 빨아 개켜놓은 옷들을 옷장에서 다시 꺼내 빠는 여자 얘기를 이전에 들었다면 그녀는 얼빠진 짓이라며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래야 했다.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이라도 옷깃과 소매와 무릎을 문질러 빨아야 했다.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그 밤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기 위해. ... 그날 밤 10시가 지나 그녀가 돌아왔을 때 집에는 남편 혼자 있었다. 그녀가 현관에 들어섰을 때 그는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는 참이었다.
잠시 후 열린 현관문으로 한조가 들어섰다. 아들의 몸에서 물감 용제와 시큼한 땀냄새가 났다. ...
희미한 달빛 아래 길고 가느다란 수인의 윤곽이 나타났다. ...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 왜 학교가 아닌 언덕 위에서 오는지, 그날 아침에 갈아입은 바짓자락이 왜 젖어 있는지, 얼굴은 왜 또 그렇게 창백한지 추궁했다.
"누구랑 좀 다퉜어요. 별일 아니에요."
P120
경찰 조사과정에서 아버지는 모든 범죄사실을 자백했다. 자신을 따르던 지수에게 사진을 찍어준다며 댐으로 꾀어내 추행을 시도하다 반항하자 유수지로 밀어 넣어 익사케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일체의 신체 고문이나 강압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시간이 흘러 모든 진실이 드러났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되돌릴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며, 서로를 지키고자 했던 거짓이 오해가 되었고, 그 오해가 진실이 된 것이다. 그때 있었던 진실은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으므로.
P361
수인은 지금까지 왜 그런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삶의 매 순간 그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그는 애써 외면하거나 안간힘을 다해 떨쳐냈다. 그들이 그토록 오래 침묵을 지켰던 이유는 서로 상처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 덮어둔 침묵의 내부에서 자라난 거짓이 그들을 파멸시키려 들고 있었다.
.....
수진은 한조를 사랑했다. 그녀의 증오는 사실 사랑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를 향한 사랑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치의 거짓이 없었다. 그러나 한조가 진실되게 사랑한 사람이 자신이 아닌, 지수였음을 알게 될수록 그를 향한 사랑이 죄책감이란 마스크를 쓴 증오로 바뀌기 시작한다.
P274
수진은 한조가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안달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가 지수를 사랑했던 것보다 깊이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싶었다. 그의 재능이 구원받으면 그의 삶이 구원받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도 출구 없는 어둠에서 벗어날 거라 믿었다.
P289
그림 속 여인은 얇은 반투명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물에 누워 있었다. 갈색 물풀이 자라는 검은 늪 뒤로 잔디 언덕이 펼쳐졌고 하워드 주택이 보였다. ... 화관을 쓰고 물에 반쯤 잠긴 여인은 연약해 보였다. 이곳저곳에 흉터가 있는 몸은 가늘고 창백했다. 그는 모델인 그녀를 통해 오필리아의 신화적 면모를 표현했다지만 정작 당사자로서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여린 모습이었다. 분명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자꾸 다른 사람이 생각났다.
어느 순간 그녀는 그림 속의 오필리아가 자신이 아닌 지수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는 왜 그녀를 그렸을까? 그는 그녀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보았던 걸까?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그녀는 그림 속의 여인처럼 미소를 지었을까? 그는 나와 그녀 중 누구를 그린다고 생각했을까?
죽은 그녀가 그의 눈앞에 있는 자신보다 더 강하게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동안 찾은 자료들이 질서정연해 졌고 흩어졌던 기억이 제자리를 찾았다.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한조는 수진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P369
실내에는 빛이 거의 없다. 문득 그림 속 여인이 낯설게 보인다. 자신이 누구를 그렸는지 알 수 없다. 밝아오는 새벽처럼 느리지만 거스를 수 없는 깨달음이 다가온다. 오래 잊었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제야 날카로운 자각이 그의 몸을 관통한다. 아내는 그림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그린 오필리아가 지수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오필리아를, 아내를, 지수를 끌어안고 운다.
.....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므로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감정 또한 너무나 연약하기에 순간의 오해로 언제든지 사랑이 증오로 바뀔 수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착각과 오해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우리의 삶을 파멸로 이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은 누군가를 살인한 직접적인 행동이 아닌, 희미한 물음표로 인해 파괴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맞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왜곡되었음에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물음표로 인해 그것을 더욱 더 진실로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가해자가 없다. 그저 모두가 가해자라는 죄책감을 가지며 살았을 뿐이다. 사실은 모두가 침묵을 택한 희생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말한 거짓은 진실이었고, 상황이 말하는 진실은 거짓이었다. 진실된 사랑은 증오였고, 혐오스러운 증오는 결국 사랑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진실이라 믿었던 기억은 사실 왜곡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며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답이 없는 삶,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삶, 희생자와 가해자가 결국은 하나인 삶, 진실이라 믿었던 기억이 사실은 왜곡이었던 삶, 이것이 현재 우리의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