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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준 Aug 26. 2022

나의 아가, 나의 책




2년 전 이맘때 즈음 나는 산후조리원에 있었다. 출산 가방을 싸면서 몇 권의 책도 함께 넣어갔다. 수유실에서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다, 홀로 방 안에서 가슴에 깔때기를 대고 유축을 하다 잠깐씩 짬이 나면 책을 펼치곤 했다. 조리원 동기 중 몇몇은 우스갯소리로 내게 말하곤 했다. "언니 또 책 읽는다, 언니 제발 좀 쉬어요." 웃으며 알았다고 말해놓고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또 책을 펼치곤 하던 시간들. 내겐 그 시간이 어쩌면 쉼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되었다. 잘 먹고 잘 자주는 아기였지만 그래도 육아는 육아였다. 내겐 산후우울증 대신 산후화병 같은 게 찾아왔다. 젖병을 씻다 뭔지 모를 답답함에 젖병 솔을 싱크대 구석에 던져버리기도, 고작 아기가 이불에 우유를 쏟았다는 이유로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까지 표출하지 않는 감정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기에게 쏟아낼 때도 있었다. 화를 내는 순간, 고작 그 몇 초의 시원함 뒤에는 자기혐오 비슷한 감정이 반드시 따라온다. 제일 만만하고 힘없는 애한테나 소리 지르고, 나는 얼마만큼 못났나, 부끄럽고 미안하고 온갖 괴로운 감정이 한 데 엉킨다. 그렇게 육아를 하며 나라는 사람의 밑바닥을 봤다.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이었나, 혹시 분노조절장애는 아닐까 싶을 만큼 이상하게 화가 자주 났다. 우울과 화는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깊은 우울감에까지 빠지지는 않았던 건 아무래도 책 덕분이었다.

100일쯤 지나서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은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카페를 가서 한두 시간 정도 책을 읽다 오곤 했다. 카페를 가지 않는 날엔 아기가 잠들면 10분, 20분이라도 책을 읽었고, 낮잠 잘 땐 좋아하는 책을 필사하며 머리를, 마음을 비우기도 했다. 아기를 낳고 육아를 하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은 많이 없겠지,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책은 한동안 자주 못 보겠거니 미리 맘먹고 있었던 것 같다. 아기를 낳고 보니 정말 책 읽을 짬은 부족하고 부족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기어이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아기가 밤에 잠들면 집안일은 일단 미뤄둔 채 책을 펼쳤고, 한 손은 아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론 책을 든 채 수유를 할 때도 있었다.

육아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나의 욕구가 아닌 아이가 원하는 것, 아이에게 필요한 걸 최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게 컸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할 수 없는 것이 육아였다. 숨 좀 돌리고 식탁 앞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려 잔을 들다가도 아기가 울면 달래러 가고, 잠깐 누워 쉬어야지 하다가도 아기 입가에 우유가 흐르는 걸 보면 벌떡 일어나 닦아주고 있었다.

일상의 대부분이 아기에게 초점이 맞춰지기에 내가 원하는 걸 하는 시간이 잠깐이라도 꼭 필요했다. 책 읽을 짬이 없음에도 나도 모르게 자꾸만 책을 펼쳤던 건, 아마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육아를 하는 동안 매일 조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한다는 걸. 그렇게 할 때라야 이 힘든 육아라는 터널을 무조건 참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것으로 버텨내는 것이 아닌 조금이라도 즐겁게, 조금 더 기쁨을 느끼며 할 수 있으리란 걸.

 
아기 재우고 난 뒤 '육퇴'후 맥주 한잔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엄마, 마음 맞는 사람들과 수다로 힐링하는 엄마 등등 다양하겠지만 내겐 그저 하루에 얼마간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루에 딱 30분 만이라도 고된 육아와는 전혀 관계없는 세상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 낯선 세상으로 가는 방법 중 가장 쉽고 재밌는 것이 내겐 독서였다. 잠시나마 책 속 세상으로 다녀오고 나면 그날의 육아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되곤 했다. 아가와 함께하는 나날들이 너무 소중해서, 조금이라도 좋은 에너지로 좋은 컨디션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서른여덟, 나의 지금 인생도 순간도 참 소중하기에, 모든 소중한 ‘지금’을 위해 너무 무리하지도, 희생하지도 않기 위해서 앞으로도 나의 즐거움들을 하루에 얼마간이라도 찾으려한다.




늘 책이 함께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릴 땐 집에 책이 많은 편도 아니고 책 읽는 습관을 붙인 것도 아니었던 터라 많이 읽진 못했다. 그럼에도 어릴 적부터 그냥 책이 좋았다. 언니들과 탐구생활 숙제하러 버스를 타고 지금은 수성도서관이 된 효목도서관에 자주 가곤 했다. 도서관에 가면 마음이 편안했다. 아니, 실은 설렜던 것 같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그 공간 안에 있으면 마냥 좋았다. 지금처럼 도서관이 많지 않던 시절, 도서관 차가 일주일에 한 번씩 책을 싣고 동네에 오곤 했다. 차에 올라타 책을 고르고 한두 권씩 빌리던 기억, 책 맨 뒷장 도서카드에 내 이름이 기록되는 걸 볼 때의 왠지 모를 몽글몽글한 감정. 책과 관련된 어린 날의 기억들은 그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다.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던 아이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게 됐고 대학 시절 내내 도서관 근로를 하며 지내다 결국 졸업 후에는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하루종일 책에 둘러싸여 지냈으면서 가끔은 퇴근 후 서점을 들르기도, 함께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 모임을 가지기도, 좋아하는 소설을 필사하기도 했다. 혼자 해도 충분히 좋은 이 취미, 시간이 갈수록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고픈 맘이 커져 여러 모임들을 찾게 됐다.

 
얼마 전엔 오랜만에 국문과 친한 동기들과 하는 독서 모임이 있었다. 갑자기 남편 직장에 일이 생겨 아기를 맡길 곳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친구들에게 사정을 얘기하곤 결국 나는 아기를 데리고 가게 됐다. 너그러이 이해해주는 고마운 친구들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아기와 함께 독서 토론을 했다. 그날의 도서는 카뮈의 <이방인>이었고 두 돌 안 된 아기와 함께 있는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뫼르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기를 달래고 어르고 먹을 걸 입에 넣어주면서 도덕과 부조리와 선과 악에 관해 토론했다. 아기 보랴 토론하랴 너무 바쁘고 정신은 없었기에 두 번은 못할 짓이다 싶은 말이 절로 나왔지만 그날의 토론은 왠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릴 때나, 청년 시절에나 직장을 다닐 때나 한 아이의 엄마로 존재하는 지금까지도 책은 늘 내 옆에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좋기만 한 것도 참 드문데, 책은 그랬다. 내게 늘 좋은 것만 주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힘들 때 사람을 만나거나 술을 마신다. 나의 경우엔 마음이 힘들 때, 고민이 있을 때 책 하나 노트 하나 들고 카페에 간다. 읽고 쓰다 보면 마음이 조금은 정화되고 위로가 되었다. 늘 사람에, 세상에 깨어 있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지만 여전히 편견과 고정관념이 많은 내게, 책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이 되어 주곤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는 것만으로 작가와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만 같은, 인생의 진리를 담은 듯한 눈부신 이야기들,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살 가치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해주던 수많은 귀한 작품들. 책 덕분에 나의 일상과 내면은 조금은 더 풍요로웠고 또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책과 항상 함께 할 것 같다고.

 
책을 잠시 덮고 아이 얼굴을 바라본다. 태어나 처음 만난 너무나 작고 소중한 존재로 인해 기쁨으로 충만하게 보낸 동시에 화내고 반성하며 그렇게 온갖 뒤엉킨 감정들로 보낸 2년의 시간들을 지나 감사하게도 아기는 너무나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많이 부족한 초보 엄마 곁에서 잘 자라준 우리 아가. 값비싼 교구나 장난감, 매주 휘황찬란한 곳으로의 나들이도 없지만 매일 아기와 대여섯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 똑같은 책을 수십 번 읽어도 지겹지도 않은지 엄마 무릎에 앉아 맑은 눈으로 늘 집중해서 듣는 아가. 그렇게 내가 삶에 힘을 얻었던 방식, 삶의 방향을 잡던 방식을 아기에게 물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도, 한 존재를 키워나가는 지금에도, 또 앞으로도, 평생 해왔던 나의 방식대로, 지내 온 발걸음대로 책은 늘 언제나 나와 함께 할 것만 같다.

오늘도 틈나는 대로 책을 펼쳐야겠다. 그리고 아가를 힘껏 안으러 가야겠다.



22. 7

우리 아가 신생아 시절에.. ♡
(왼)조리원에서의 추억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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