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주 전 즘이었던가? 한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난 노래였다. 그 내담자도 7~8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는데 이 노래가 떠올랐고, 이 노래는 21~22년 전의 내 기억을 소환했다. 내 기억 속에 '시나위'라는 밴드는 잊힐 수가 없는 밴드다.
부활과 더불어 시나위, 시나위와 더불어 부활, 김태원 님처럼 활발한 방송활동을 하지 않으시지만 신대철 님도 우리나라 롹 음악계에서 기억하고 싶은, 기억해야 할 것 같은 분이시다.
신대철 님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이 밴드에서 잠시 기타 세션을 맡았던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필사적으로 밴드 오디션을 보러 다녔었다.
노래가 하고 싶어서, 온몸의 세포들이 발악을 해대고, 아버지는 공무원이 되라고 요구하셨지만 나는 노래를 하고 싶었고, 하지 말라는 것을 더 하고 싶었었다.
대학교 3학년이 되어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휴학을 했었지만, 6개월도 못 가서 공황 증상으로 접었고, 그 이후의 스텝은 서울 재즈 아카데미 정규반 보컬 전공에 들어갔었다.
거기에 가기 위해서 나는 부모님께 리포트를 제출했고, 물론 부모님이 리포트를 요구 하시진 않았으나 말이 안 나올 것 같아서 글로 내 마음을 표현했었다.
엄마는 그 리포트를 읽어보시고, 눈물을 흘리셨고, 아버지의 반응은 그 종이뭉치를 내던지셨다. 당시에 그런 식의 아빠의 반응은 새롭지도 않았고, 나는 하지 말라는 것을 바득바득 기어코 해내는 아이였었다.
그래서 어느 비가 많이 오는 날, 대학로에 위치한 서울 재즈 아카데미에 가서 등록을 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쉽게도 적응을 하지 못했다. 적응을 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연애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에 연애를 하러 간 것이 아니었는데, 얽혀 들고 말았다. 그 연애도 실패였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애였다. 당시의 나는 같은 대학교 동갑내기, 함께 밴드를 하던 남자 친구와 cc(campus couple)였는데, 그 친구가 군대 간 사이에 얽혀버린 것이었다.
나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끈질기게 다가오는 한 아이, 내가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한 아이를 밀어내기가 어려웠으나 오래 가진 못했다. 나는 처절하게 절망했고, 그만두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 둘과 다 헤어졌다.
미칠 것 같았다. 그 둘 사이에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정말 헷갈렸다.
그리고 심리학 과목을 수강해서 공부를 했고, 상담을 받았다. 그때 상담의 경험이 좋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마음을 받아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좋았다.
그리고 대학 상담소의 상담비는 무료였다. 거의 1년 이상을 무료로 받았다. 그땐 지금처럼 대학상담센터가 활성화가 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1년 이상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게 지금보다 빡빡하지 않았던 시대였던 것 같다.
상담을 받으며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대학 4학년 때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오디션을 보러 다녔었다. 그런데 결과는 다, 실패. 지금 생각해보면 실패가 당연한 일이다. 더 노력하지 않았고, 정말 간절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이후의 삶에서 노력과 간절함에 대해서 처절하게 배웠다. 그래서 '그때의 도전은 실패가 당연하다'라는 깨달음이 온몸으로 강렬하게 와닿는다.
그리고, 임상 및 상담 심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한 길을 오롯이 가지 않았다. 방황 그리고 좌절, 무기력이 늘 함께했었다. 그래도 살아있었다. 자주 좀비처럼 늘어져있다가, 가끔 생생하게 선명하게 느끼고 움직이는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오디션을 봤던 팀 중의 하나가 위에서 언급한 시나위 밴드에서 잠시 기타 세션을 하셨던 사람의 팀이었다. 그 사람에게서 내가 탈락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많이 아쉬웠다. 그리고 그 사람을 몇 번 개인적으로 만났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이 떠오른다. 잘 살고 있겠지..